웹진 카페人  
지상의 쉼표
[인간극장] 길에서 만나는 인생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

s1_.jpg


KBS <인간극장>을 하도 오래 전에 진행해 늘 해묵은 이야기만 했다. 오늘은 요즘 내가 만나는 사람들 이야기를 할까 한다. 요즘 작가로 참여한 프로그램은 EBS <다큐 시선>, 남 다는 시선으로 세상사를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이다.

팀마다 자신들이 선호하는 아이템을 정하는데, 사람 성향은 어딜 가지 않아서 내가 하는 프로그램은 늘 사람 이야기가 많다. 아이템 회의를 하는데 피디가 만물트럭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만물트럭? 다른 다큐멘터리에서 잠깐 나온 걸 봤는데 그림도 좋고 여름에 하면 좋을 거 같다는 제안이었다. 만물트럭을 통해 뭘 이야기할까는 그 다음 문제였다. 우선 아이템을 정하고 그 다음,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정하기로 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꽤 할 이야기가 많았다. 만물트럭을 통해 우리나라 산간 오지의 현실, 더 넓게는 농촌의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거 같았다. 오늘의 농촌은 초고령 사회로 가는 우리의 미래였기 때문이다.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던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8%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던 일본에는 ‘한계마을’이란 개념이 있는데, 마을로서의 더 이상 공동체 유지가 가능하지 않은 마을을 그렇게 부른다. 좀 더 정확히 정의하자면, 전체 가구 수가 20가구가 되지 않고, 그 중에 절반 이상이 65대 이상인 마을이다. 우리의 농촌 현실도 많이 다르지 않다. 특히 만물트럭이 다니는 산간 오지와 도서 지역에는 태반이 그런 마을이다. 게다가 인구의 거의 대부분 독거노인. 할머니 인구가 월등히 많다. 한마디로 우리의 농촌은 ‘할머니 공동체’이다.

만물트럭을 따라 다니면 그런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 프로그램을 본 사람이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혹은 할머니께 전화 한 통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게 하는 것. 이것을 방송 목표로 잡았다. 소박해 보이지만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어려운 목표다.

 

버선발로 만물트럭을 맞는 할머니들

만물트럭 장수는 두 명을 취재했다. 로케이션도 대비되게 한 명은 강원도 영월 오지를 찾아다니는 손병철씨, 또 한 명은 섬 전문 만물트럭장수 최낙연씨였다. 손병철씨는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장사를 하려면 소비자의 욕구를 잘 읽어야 하고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걸 기민하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손병철씨는 그걸 기가 막히게 해낸다. 그의 하루는 참으로 고되다. 물건 실어 돌아다니며 파는 게 뭐가 힘들까 싶은데 그의 일상을 따라가 보면 그런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전통적인 만물장수는 공산품이 많지만 그의 만물트럭에는 식료품이 많다. 교통이 불편해 시장에 가기 어려운 산골을 다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의 만물트럭은 이동식 슈퍼다. 그의 하루는 장보기로 시작한다. 품목이 워낙 많다 보니, 이게 보통일이 아니다. 두부, 콩나물, 고기, 생선까지 품목별로 다 따로 장을 봐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주문이 있으면 모종도 사야하고 쌀도 실어야 한다. 평생 농사짓던 할머니들이 고객인터라, 조금만 허튼 물건을 실으면 구박받기 십상이다. 2톤 트럭이 미어터지도록 물건을 채우고 그는 영월 산골을 달린다. 하루에 15개 마을을 격일로 다녀, 30개 마을이 그의 거래처다.

손병철씨의 사업 노하우 중 하나는 집 앞 배달서비스다. 시골에서 평생 농사짓던 할머니치고 무릎 허리 안 아픈 어르신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농사도 못 짓고 채소를 사 먹어야 하는 신세인데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어찌 들고 다니겠는가? 그런 어르신들을 위해 전화로 필요한 물건 주문도 가능하고 집 앞까지 배달해 주니 가는 곳마다 버선발로 그를 맞는다. 게다가 트로트 음악 크게 틀고 요란하게 등장하시니, 적막한 마을의 할머니들에겐 반갑고 반가운 손님이다. 그 덕에 손병철씨는 돈 좀 벌었다. 할머니 쌈지에서 꺼낸 꼬깃꼬깃한 지폐들이 쏠쏠 모이는 것 같아서 물어보니, 연봉이 어마어마하다. 무려 연봉 3억. 억 소리 나는 밥벌이다. 그러나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 300키로 씩 운전하며 무거운 짐 나르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한 번 해볼까?’란 소리가 쏙 들어갈 정도의 노동 강도다.

올해로 만물 트럭 장수 8년 차 손병철씨. 그가 쉰이 넘은 나이에 길 위에 인생을 시작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트럭에서 물건 파는데도 노련미가 있다 싶었는데, 그는 베테랑 장사꾼이었다. 영월 시내에서 크게 슈퍼를 운영했던 그, 사업이 꽤 잘 되자 의욕이 앞서 사업을 확장하다 빚을 8억이나 졌다. 더 이상 빚을 감당할 수가 없던 차에 낡고 낡은 만물 트럭을 인수 받게 된 것이다. 너무 절박한 마음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트럭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 8년 경력이 되니 빚도 얼추 다 갚고 주머니에 돈도 두둑해 졌다. 그러니까 그는 트럭 하나로 역전 말루 홈런을 친 셈이다.

이제 살 만해져서 유랑하듯 조금 천천히 다녀도 좋으련만, 할머니들 목 빼고 기다릴 거 생각하면 저절로 발이 동동 굴러진다고 한다. 어쩌면 그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 외롭게 길 위에 인생을 살아야 하는 그는, 할머니들의 그 관심과 사랑이 살아가는 원동력일지 모른다. 생각해 보라! 이 나이에 누가 나를 하루 종일 오매불망 기다리고 또 만나면 좋아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서로에게 고맙고 고마운 관계는 또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사람 사는 정이 있어 고단한 인생도 견딜 두 있는 게 아닐까?
 

 

인간극장2.jpg

정자 위의 텐트

섬마을을 다니는 최낙연 만물장수는 18년차다. 아무래도 섬이 물자가 귀하기 때문에 섬으로 거래처를 삼았다는 그. 그는 6개월 단위로 백령도, 울룽도 등 전국의 섬을 순례하기 때문에 섬 주민들은 1년에 한 두 번씩 그를 만날 수 있단다. 그래도 18년이 세월이 쌓이다 보니, 그가 나오면 일부러 나와서 작은 것 하나라도 사주는 이들이 있다. 특히나 그의 트럭에는 낫이며 호미, 칼 가는 숱 돌 등 아무데서나 살 수 없는 진기한 물건이 차고 넘친다.

섬마을 만물 장수를 통해서도 우리는 비어가는 농촌의 현실을 볼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물건이 절반만 돼도 팔린 건 팔려 먹고 살만 했는데, 요즘은 인구가 많이 줄어 지붕 위까지 물건을 쌓고 다녀야 겨우 예전만큼 돈을 벌 수 있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는 곳마다 어르신들 생사를 묻는 게 일상이다. 그러니 6개월 만에 만나는 할머니 얼굴이 반가울 수밖에. 그런 마음이 있어서 3년 전 산 노래 재생기가 고장 났다고 들고 와도 싫은 내색 없이 뚝딱뚝딱 고쳐준다. 이렇게 쌓아 온 인심이 오늘 그를 먹고 살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병철씨처럼 길에서 만나는 숱한 사람들 속에서 위안을 얻는 최낙연씨도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무슨 사업을 했었는지는 말 하진 않았지만, 자기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만물장수를 선택했다고 한다. 보통 한 번 섬에 들어가면 2주 정도 있다가 집에 가서 1주일 정도 쉬고 다시 길을 나서는 고된 인생을 살았다.

해가 지자 최낙연씨가 차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바닷가에 번듯하게 자릴 잡은 정자. 뭘 하나 지켜보니, 정자 위에 텐트를 치는 것이 아닌가? 그곳이 만물장수의 숙소였던 것이다. 뭐 맨날 그렇게 자는 건 아니지만 날 풀리고 적당한 자리만 있으면 하루 이틀이라도 이렇게 야영 생활을 자처하는 그. 텐트 안에 누워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최낙연씨. 여관비 5만원이 너무 아까웠단다. 차에서 자보려고도 했지만 다리를 펼 수 없어 그것 도 못하겠더란다. 그 후에 찾아낸 방법이 텐트 생활인데 만족, 대만족이라고 한다. 그는 누워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르신들이 한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 어르신들이 그랬어요. 돈은 입으로 벌어야 하는 거라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자고 싶은 거 다 자고는 돈을 벌 수 없는 거야. 무조건 아껴야 하는 거야. 그렇게 아껴서 자식들 다 키우고 그렇게 살았어요.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에요. 우리 시대에는 다 그러고 살았어.”

달까지 휘영청 떠있는 텐트를 보고 저 인터뷰를 들으니 가슴이 찡해 왔다. 고단한 인생을 살아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먹는 거 입는 거 아껴가며 살았던 이 시대 어머니, 아버지들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그리고 또 깨닫는다. 위로라는 건 큰 데서 받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만물장수의 고단한 인생을 위로하는 건, 결국 그 못지않게 고단한 인생을 산 할머니들의 정이었다. 끼니 거를까봐 부침개를 해오고, 혹시 공칠까 걱정돼 필요치도 않는 물건을 사주는 그 정. 그래서 몸은 고달파도 만물장수의 길 위 인생이 고단하지만은 않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나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와 줘서 고맙고 또 고마운 존재는 누구일까? 또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나? 금세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찬다. 그러면서 괜히 나의 SNS 목록에 올라온 사람들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글 | 한지원
한지원 님은 1990년부터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간극장> <그것이 알고 싶다> <명작 스캔들> 등 주로 교양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집필했습니다. 2018년 현재 KBS <한국인의 밥상>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