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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극장] 진짜 이야기와 가짜 이야기

감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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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수업 때 일이다. 나는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는 메커니즘을 학문적으로 밝히고 싶었다. 다 늙은 나이에 꾸역꾸역 대학원을 간 것도, 학위가 필요해서였기도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그 경험을 이론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서였다. 연극을 전공하고 내러티브를 가르치는 강사에게 이런 나의 의지를 말했다. 그는 열정이 강한 선생님이었다. 나의 이 질문에 선생님도 그 답을 찾고 싶어서 다른 곳 특강을 가서 주부들에게 질문을 했단다. ‘당신이 감동을 받은 일을 떠올려 보세요’라고.

그랬더니 아줌마들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더란다. 무엇이었을까? 선생님이 터득한 두 가지 사실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는 감동은 큰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작은 데서 오는 거란 사실. 두 번째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명쾌한 답이란 말인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작고 소박한 것이 주는 어떤 감정, 이것이 바로 감동이라는 얘기다. 결국 휴먼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작은 구슬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것만이 시청자에게 전달되고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의 전제 조건은 주인공이 가진 진정성이다. 진짜 이야기를 하느냐, 그리고 진짜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 털어 놓느냐 마느냐가 프로그램의 감동의 질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송하는 사람들에겐 직관적으로 한눈에 사람을 판단하는 습성이 많이 나타나는데, 늘 이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찾아내는 일의 속성 때문이다. 대부분 맞지만 맞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나 자리 깔아도 돼’ 혹은 ‘난 척 보면 알아’ 이런 유의 오만은 늘 경계해야 한다.

공동묘지에서 운동하는 여자

오늘 이야기하려는 ‘나는 날고 싶다’의 정선 씨는 내가 직접 작가를 한 작품이 아니고, 내가 팀장을 하면서 만난 인물이다. <인간극장> 아이템 찾기는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대부분은 화제가 되었던, 혹은 숨겨졌지만 세상에 널리 알리면 좋을 인물들을 찾아 취재를 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해서는 좀체 매주 인물을 찾아낼 수 없다.

그래서 고안해 낸 아이템 발굴법이 일종의 ‘기획기사 쓰기’. 사회면 기사를 뒤지면서 사회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럼 이런 사람도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통해 아이템을 발굴한다. ‘기러기 아빠’, ‘황혼 이혼’, ‘초록이 치매’, ‘두 부인과 한 집에 사는 할아버지’ 등등. 취재와 섭외를 맡아 하는 막내 작가 책상 위에는 그런 아이템 목록이 메모돼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초고도 비만 환자’ 취재였다. 이런 경우엔 여러 관련 병원이나 기관 등에 연락을 해두고, 취재에 적당한 인물이 나타나면 방송을 한다. 한 마디로 기다림으로 얻어내는 아이템이다. 초고도 비만 환자가 늘어나면서 그들의 아픔과 속내를 이야기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열심히 찾으면 언젠가는 길이 열리는 법! 192킬로그램의 정선 씨와 인연이 닿았다. 우리나라처럼 남의 시선이 중요한 사회에서 평균 이상인 모든 사람의 삶은 녹록지 않다. 키가 커도, 키가 작아도, 뚱뚱해도, 말라도 모든 게 수군거릴 이유다. 특히 비만인구가 서양에 비해 적은 우리나라에서 초고도 비만 환자는 길을 나서는 일조차 용기가 필요하다.

정선 씨 역시 운동을 해야 하고 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 시선이 힘들어 동네 뒷산 공동묘지에 올라가 거기에서 밤 운동을 하곤 했다. 이처럼 주된 이야기는 날카로운 시선과 편견 때문에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가, 비만은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질병이란 사실을 알려야 했다. 길나서기도 어려운 처지에 정선 씨가 우리와 만난 후에 방송에 나와 주겠다고 나서 준 것도 초고도 비만 환자들의 어려움을 대변하고 싶어서였다.

정선 씨는 45년 동안 노점상을 해온 엄마와 살고 있었다. 살갑고 다정한 효녀였다. 정선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처음엔 직장에 들어갈 생각도 있었지만 뚱뚱한 몸으로 면접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정선 씨는 콜센터 전화 서비스 요원부터 신발장사, 액세서리 노점상, 호프집 서빙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해왔다. 하루 12시간이 넘도록 그렇게 악착같이 일할 수 있었던 건 평생 고생만 해온 엄마에게 편히 쉴 수 있는 집 한 채 사드리기 위해서였다.

10년을 고생해 어느덧 그녀 나이 서른, 정선 씨는 드디어 집을 장만했다. 하지만 엄마가 지인의 보증을 잘 못 서주는 바람에 피땀으로 장만한 집 한 채가 고스란히 날아갔다. 다시 산동네 셋방을 전전해야 하는 처지가 돼버린 정선 씨.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했다. 일어설 힘이 없었다. 그냥 될 때로 돼라 였다. 삶의 의욕도, 미련도 없었다. 집에서 지낸 8개월 동안 늘어난 것이라고는 몸무게뿐이었다. 이것이 초고도 비만이 심각해진 정선 씨의 이력이었다. 처음엔 초고도 비만 환자를 위한 수술을 진행하고 정선 씨 마음 속 그늘을 없애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으면 되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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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된 아이템의 의외의 진전

그런데 촬영이 진행되면서 정선 씨 가슴에 숨겨진 이야기는 훨씬 큰 것이었다. 촬영일 수가 길어지면서 정선 씨는 마음의 응어리를 카메라 앞에 솔직히 내려놓기 시작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정선 씨는 혼자가 된 엄마의 혼외 자식이었다. 시장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어쩌다 임신을 하게 되었지만 그것을 숨기고 생계를 이어 가야 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시장 사람들에게는 정선 씨를 업둥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친모임에도 친모가 아닌 줄 알고 살았던 것이다.

정선 씨는 초등학교 때 어른들 이야기를 엿듣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엄마에게는 차마 이야기 하지 못했다. 이것이 얹힌 것처럼 정선씨 마음에 있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 키워준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지만, 왜 내 딸이라고 말하지 못했느냐는 원망을 가슴 깊이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스트레스가 그를 초고도 비만 환자로 만들었다. 또 한 편으로는 ‘착한 딸 콤플렉스’도 생겼다. 어떻게든 엄마의 사랑 받는 딸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죽어라 일해 집까지 마련했던 것이었는데….

취재팀이 그를 만났을 때는 어떻게든 힘을 내 재기를 꿈꾸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선 씨는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수술까지 받을 결심을 하면서 방송 출연을 승낙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기회 때문에 그랬나 싶었는데, 정선 씨는 그보다 큰 계획이 있었다. 방송 촬영 과정에서 엄마와 솔직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어려운 것을 정선 씨가 해냈다. 방송을 타고 엄마에게 자신이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했다. 엄마는 미안함과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솔직함에 사람들은 감동했고, 높은 시청률을 올리며 무려 11회로 방송을 마쳤다. 취재진보다 더 훌륭한 출연자의 연출이었다.

그녀의 도발적 고백 이후, 정선 씨는 몰라보게 밝아졌다. 많은 의학적 연구에 따르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낼 때 치유의 효과가 커진다고 하는데, 정선 씨는 몸으로 그 연구 결과를 확인시켰다. 아픈 이야기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아픈 걸 아프다고 이야기 하는 것, 슬픈 걸 슬프다고 표현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치료법이란 사실을. 그녀의 가장 큰 무기는 솔직함이었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게 무언지 아는 사람이었다. 이것을 제작했던 박 피디는 그 진정성을 봤기에 방송 후에도 꾸준히 정선 씨를 돌봤다. 재작년인가? 결혼한다고 청첩장도 보내왔다. 해외 일정이 있어 결혼식에 참석하진 못했지만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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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함의 힘을 믿으며

우리 안에도 정선 씨와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크고 작은 아픔이 하나 둘 가시처럼 폐부를 찌른다. 하지만 이것을 외면하는 게 요즘 세태다. 많은 자기계발서는 아프고 슬픈 과거 따위는 부정적이기 때문에 오로지 긍정적인 마음만 가지라고 강요한다. 트라우마 치료도 약 하나로 대체한다. 방송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 콘텐츠는 인스턴트 같은 즐거움만 추구한다. 이런 공기 속에서 성찰을 부르는 두꺼운 책이며, 남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구질구질한 다큐멘터리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인문학 열풍이 불어도 우리 사회가 나아지지 않는 건, 나의 이야기를 솔직히 말 할 수 없어서이고 남의 이야기를 온 마음으로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혀를 끌끌 찰 노릇이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부지런히 진짜 이야기를 찾아내고, 솔직하게 말하는 길을 이끄는 수밖에. 내가 근사한 발명가라면 이런 진짜 이야기만 나오는 ‘진짜 이야기 자판기’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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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