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인문학, 인문에세이
2024-06-18   0   27
웹진 카페인  
내 마음의 카페
[인문학카페] 60여년 전 꿰뚫어 본 우리의 모습

부조리한 일상 비틀기_이근삼 희곡 <원고지>

[인문학카페] 60여년 전 꿰뚫어 본 우리의 모습 |

일상이 부조리하다는 말은 진부할 만큼 많이 듣는 말이다. 자애롭고 다정다감해야 할 가족들이 돈을 매개로 서로의 관계를 저울질하는 비극적인 일들이 심심찮게 뉴스를 장식한다.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자본주의가 파괴하는 인간의 여러 모습이 있겠지만 마땅히 딱 꼬집어 말하기도 애매하다. 무언가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어디서부터 짚어볼지 대략난감이다.

기계처럼 살아가는 지식노동자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우리 연극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작가 이근삼이 1960년 《사상계》에 발표한 희곡 <원고지>이다. 과거의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중년 교수의 일상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현대인들의 무기력하고 반복적인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실험적인 성격을 띤 이 작품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걸출한 작품을 남긴 극작가 이근삼의 국내 첫 데뷔작이라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1960년대는 한국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아 사실주의 극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다. 사실주의 극에서 벗어나 실험적 연출과 기법을 선보인 이 작품은 번역작품이 대다수였던 시절에 창작희곡을 선보였다는 점과 20세기에 등장한 부조리극 형식을 과감하게 차용해 평단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인간의 실존문제와 자본주의의 소외를 기발한 장치와 배역으로 묘파해낸 점은 시대를 앞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인문학카페1.jpg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구속받고 지내는 ‘교수’는 늘 피곤에 지쳐 있다. 심지어 ‘처’의 돈에 대한 추궁은 ‘교수’를 이성이 마비된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장녀’와 ‘장남’은 갖가지 핑계를 대며 끊임없이 아버지인 ‘교수’에게 용돈을 요구한다. 교수는 한때 학문적 이상을 꿈꾼 영문학자이지만 현실에서의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중압감에 짓눌려 사고능력과 꿈을 잃어버린 인물로 등장한다. 극 중간에 나오는 ‘천사’에게서 자신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감독관’이 재촉하는 번역작업에 몰입한다. 교수는 장녀의 손에 든 영자 신문마저 습관적으로 번역하려할 정도로 돈만 버는 기계적 삶을 살아가고 가족들은 무관심하게 그를 대한다. 

특별한 사건이나 사실주의 극이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극적인 갈등이 없이 진행되는 이 작품은 대신 무대 장치를 활용하거나, 소도구, 인물의 대사 등을 통해 기계적 삶을 풍자한다. 특히 등장인물들이 구체적 이름 없이 3인칭으로 제시된 것은 자본주의적 사고가 가족마저도 소외시키는 상황을 적절히 드러낸다. 작가는 첫 장면에서 교수를 이런 모습으로 등장시킨다. 다소 길지만 극의 이해를 위해 인용한다. 

(졸음이 오는 지루한 음악과 더불어 철문 도어가 무겁게 열리며 교수 등장. 아래 위 양복이 원고지를 덧붙여 만든 것처럼 이것도 원고지 칸 투성이다. 손에는 큼직한 낡은 가방을 들고 있다. 허리에 쇠사슬을 두르고 있는데, 허리를 돌고 남은 줄이 마루에 줄줄 끌려 다닌다. 쇠사슬이 도어 밖까지 나가 있어 끝이 없다. 도어를 닫고 소파에 힘들게 앉는다. 여전히 쇠사슬을 끌고 다니면서, 가방은 자기 옆에 놓고 처음으로 전면을 바라본다. 중년에 퍽 마른 얼굴. 이마에는 주름살이 가고, 찌푸린 얼굴은 돌 모양 변화가 없다. 잠시 후, 피곤하다는 듯이 두 손을 옆으로 뻗치면서 크게 기지개를 한다. ‘아아’하고 토하는 큰 하품은 무엇에 두드려 맞아 죽는 비명같이 비참하게 들려, 오히려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장녀가 플랫폼에 나타난다.) 

첫 장면이 담아내는 형식적 과장과 의미는 이 연극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원고지로 공간을 꾸미고 원고지로 된 양복을 입었다는 점은 교수가 원고지의 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즉, 번역하는 것이 일상이 돼버린 영문학자의 삶과 규격화된 틀 속에서 무의미한 일상을 사는 ‘교수’를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자녀들의 화려한 방과 허름한 교수의 방을 대조적인 분위기로 제시한 무대장치는 가족에 대한 의무감으로 인해 짓눌려버린 가장의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소도구인 교수의 허리에 찬 쇠사슬은 삶으로부터 압박과 구속을 받고 있는 교수의 심리를 상징한다.  

처 : (순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옆방을 향하여) 얘들아. (잠시 후) 얘들아. (대답이 없다. 여전히 부드럽게) 얘들아.  
장남 : (처의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호령이나 하듯이) 왜 그래요?
처 : 가벼운 음악이나 틀어라. 아버지가 피곤하시단다.

장남 : (귀찮다는 듯) 알겠어요! (옆방에서 축음기 소리가 난다. 시끄럽고 귀가 아픈 곡이면 어떤 음악이건 상관없다. 판이 고장이 난 듯. 똑같은 곡이 되풀이된다. 처는 무표정한 얼굴. 교수는 시끄럽다는 듯이 손으로 귀를 막는다. 참다못해 교수는 손을 흔들며 중지하라는 시늉을 한다. 음악이 멎으며 옆방이 밝아진다. 소파에 앉아 무엇을 처먹고 있는 장남과 아무렇게나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 장녀가 보인다.)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대사는 가족끼리의 대화가 단절되고 유대감이 상실된 것을 풍자한다. 또한 자녀들의 퉁명스러운 말투는 전도된 가족관계를 드러낸다. 1960년에 발표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주변 어디선가에서 본 듯한 장면이지 않은가. 작가가 50년 전에 꿰뚫어 본 자본주의 가족의 모습이 지금은 얼마나 더 파편화되고 획일화된 지는 짐작이 가고 남는 부분이다. 또한 가족이 서로를 따뜻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보통명사로 제시됨으로써 이들이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객관화된 관계임을 표현한다. 이 호칭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작품이 단순히 한 가정이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의 보다 넓은 관계로 풍자의 폭이 넓혀지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꿈을 잃은 채 타성으로 살아가는 삶 

장녀 : (신문을 읽는다.) 비가 많이 왔어요. 강원도 쪽의 눈이 굉장한 모양이에요. 또 살인입니다. 이번에 두 살 난 애가 자기 애비를 죽였대요. 참, 지프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졌답니다. 지프차는 도망가 버리구. 이것 봐요. 아버지의 ‘개성을 잃은 노동자’라는 번역책이 악마사에서 다시 나왔어요. 이씨가 또 당선됐답니다. 신경통에 듣는 한약이 새로 나왔군요. 끔찍도 해라.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또 매맞았대요. 

마지막 장면에서 장녀가 교수에게 읽어주는 신문의 내용은 이 작품이 표현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드러낸다. 비현실적이고 냉소적인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사건들을 나열함으로써 현대인의 모순을 고발하는 것이다. 유심히 생각해볼 대목은 주인공이 교수로 설정된 점이다. 교수는 자신의 지식과 양심을 기반으로 현실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직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속의 ‘교수’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은 고사하고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 채 극히 속물적으로 변해버린 존재로 그려진다.  

인문학카페2.jpg

한 노동자의 삶을 희극적으로 영화화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노동자, 과학자, 자본가 등을 출연시켜 자본주의를 풍자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국가, 감옥, 공장, 정신병원 등을 통해 자본주의적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이 비틀어진 가족의 모습이 그려진 <원고지>와 오버랩된다. 정확한 시간에 출근해야 하며, 화장실에 갈 때조차 타임카드에 구멍을 뚫어야 하는 공장 노동자 채플린이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는 장면은 기계처럼 이어지던 교수의 삶이 원고지 칸으로 갇혀버리는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교수의 삶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지도….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