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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1   0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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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종이박스, 호미, 천을 만드는 힘

관계라는 이름의 함수, f(x)=y

[부치지 못한 편지] 종이박스, 호미, 천을 만드는 힘 |

종이박스를 정리하면서 알았습니다.
포장박스는 골판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만듭니다. 골판지는 두껍고 단단한 판지 한쪽 또는 두 장의 판지 사이에 물결 모양의 골이 진 종이를 붙인 것입니다. 충격이 가해지면 안에 있는 골은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며 물건을 보호하지요. 튼튼하고 무거운 박스일수록 종이의 겹은 많았고, 골은 더 깊었습니다. 얇은 골 종이들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를 악착같이 붙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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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박스는 ‘관계’입니다.
종이박스는 물건을 위해 기꺼이 제 몸을 네모반듯하게 접었습니다. 박스에는 물건만 담겨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박스는 ‘관계’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저와 물건의 관계뿐 아니라 보내준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가 들어있었습니다. 포장한 상태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 관계를 지켜주느라 찢어지기도 했고, 꺾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종이박스는커녕 골판지만큼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당신과의 사이에 거북한 감정의 겹들이 들어차는 것이 불편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감정의 골이 깊어져 괴로워했던 적도 있습니다. 단조로운 생각과 시선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당신을 박스 접듯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용서를 빌어야겠습니다.
골판지는 얇은 종이를 물결 모양으로 이어가면서 벌어진 사이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골이 깊고 두꺼울수록 관계는 더욱 단단해집니다. 더 나아가 꺾이고 접히면서 번듯한 종이박스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왜 당신과 벌어진 틈을 좁힐 생각은 못 했을까요? 생각만 많았지 진짜 생각은 못 했던 결과이겠지요. 골판지도 헤아리는 진실을 저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지난여름의 일입니다.
주말농장에서 틈틈이 푸성귀들을 키우며 수확에 나섰던 적이 있었지요. 호미를 들고 밭일을 하다가 깊이 박혀 있던 돌부리에 호미 자루가 그만 빠져버리고 말았지요. 그때 슴베를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슴베는 칼이나 호미 같은 도구에 박혀 있는 손잡이를 말합니다. 길고 뾰족하며 쇳덩이로 되어 있죠. 슴베를 직접 쥐고서는 일을 할 수가 없어 사람들은 슴베를 나무로 된 자루에 박아서 사용합니다.

쇳덩이에도 뿌리가 있습니다.
칼이나 호미의 빛나는 겉모습을 위해 쇠붙이의 뿌리는 자신을 깊이 감춥니다. 금속의 뾰족함은 위험하기 때문에 호미나 칼을 만들 때 아주 깊숙이 슴베를 나무 자루에 박아둡니다. 슴베가 깊이 박힐수록 호미는 더 큰 힘을 냅니다. 그래서인지 슴베는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볼일이 없는 물건입니다. 뿌리가 드러나는 순간은 위태롭기는 하지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호미도 그렇고 사람들의 관계도 그럴 때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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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쇠꼬챙이가 하나가 되면 쓸모 있는 도구가 됩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물질들이 모여 더 나은 물질을 만들어 냅니다. 물질을 사람으로 바꿔 읽으면 사랑이 어디서 비롯하는지를 알 것도 같습니다. 새 호미를 들고 일을 많이 할수록 슴베와 나무가 더 깊이 엮이고 파고들어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되지요.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이로 만나지만 자주 볼수록 관계는 깊어집니다. 가끔은 나무 자루에서 슴베가 빠져나와 헐렁해지는 경우도 있지요. 그때 사람들은 호미의 예리한 부분이나 칼의 날카로운 끝을 망치로 두들겨 슴베를 나무 자루 안으로 밀어 넣지 않습니다. 헐거워진 호미의 나무 자루를 잡고서는 바닥을 향해 내려치듯이 두들기며 조입니다.

사람들의 관계가 어떻게 좋기만 하겠습니까.
관계가 틀어져 상처가 드러날 때가 더러 있지요. 그럴 때는 슴베를 조이듯이 관계의 빈틈을 메워야 합니다. 느슨해진 관심을 더 팽팽하게 당겨야 합니다. 저는 그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이가 헝클어지고 얽혔다고 해서 서로의 상처를 더 후벼 파서는 안 될 일이지요. 나무 자루를 아래로 내려칠수록 슴베가 더 단단히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덜 날카로운 사람이, 비록 조금 더 아프고 고통스럽더라도 더 날카로워진 상대를 너그럽게 품어야 하는 게 옳은 일일 겁니다. 사람 사이에도 이치가 있다면 이런 모습들이 해당하지 않을까요.

며칠 전의 일입니다.
입고 있는 푸른색 니트에 실 한 올이 삐져나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으레 그랬듯이 가위를 가져와 실을 들춰내고 가위를 듭니다. 말끔히 끊어내기 위해 올을 잡아당겨 봅니다. 멀쩡했던 니트의 옷감이 겁을 먹었는지 몸을 뒤로 움츠리더니 다른 실들을 붙들고서는 쪼그라듭니다. 실들도 혼자 있던 게 아니었죠. 머리로만 알고 있던 씨줄과 날줄이 움직이는 모습을 직접 보는 순간입니다. 평범한 천 조각인줄 알았는데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던 옷감의 관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가로축을 버티는 씨줄과 세로축을 이으며 단단하게 얽어내는 날줄의 조직은 힘을 넓혀 나갑니다.

관계는 힘의 원천입니다.
점과 점이 만나 좌표를 이루고 한 지점이 다른 지점을 만나 선분을 이룰 때 공간이 나타납니다. 이 공리의 진실은 사람의 관계 맺음에도 적용되는 기본 원리입니다. 씨줄과 날줄이 만나 관계를 확장해 나갑니다. 힘이 관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느낍니다. 사랑도 힘이고 실패한 사랑에서 솟는 슬픔도 힘입니다. 당신과의 관계에서 힘의 실체를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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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