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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기억이 사는 마을, 회룡포

스며들고 기다리는 ‘침묵’

[부치지 못한 편지] 기억이 사는 마을, 회룡포 |

지난 가을 회룡포에 갔습니다. 이곳을 행선지로 정한 것은 ‘회룡포’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회룡포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일대에 있는 마을입니다. 내성천의 지류가 마을을 끼고 흐르는 지리적 특징은 필연적으로 공간의 고립을 만들어냈습니다. 육지 속의 섬마을은 확실히 낭만적입니다. 고립감이 주는 아득한 신비함도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끄는 이유입니다. 사실 이런 느낌은 외지인에게만 해당하겠죠.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이 마을의 이름 안에 머물러 산다는 것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열 가구 남짓 모여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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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령포 전경

이름에는 뜻이 담겨 있기 마련입니다.

‘회룡’이라는 말은 용이 마을을 감싸며 돈다는 뜻입니다. ‘포’는 강이나 내에 물길이 드나드는 곳을 이르는 한자어입니다. 우리말로는 ‘개’라고도 부릅니다. 경상북도 일대의 젖줄이 되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끼고 흐르는 모양에서 비롯한 말입니다. 마을에 들어섰을 때, 예천군 용문면 일대를 가로지르는 물길이 먼저 사람을 반깁니다. 그 안에 고여 있는 마을의 인적은 드물었고 드문드문 보이는 물새는 움직임이 잦았습니다. 

어쩌면 바다에서부터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섬일지도 모릅니다. 내륙의 한복판에 떠 있는 섬마을은 뜻밖에도 한적한 바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다 위로 솟아오른 섬 아래에 엄청난 크기의 봉우리가 잠겨 있듯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을 물길이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회룡포는 제가 도착한 오후에도 바다로 나서려는 용의 비늘 같은 물길이 꿈틀거리며 반짝였고, 물살을 흔들며 반짝이는 윤슬은 호기심 많은 외지인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회룡포에 들어서면 우리나라가 보입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에서 살아왔던 우리 민족의 삶은 어쩌면 회룡포 주민들의 그것과 닮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닷길이 삼면을 막고 있다가 이념으로 북쪽과 갈라진 지금의 우리 국토는 육지이지만 섬이 될 수밖에 없지요. 건너편에 버티고 앉은 비룡산의 나지막한 산자락도 마을 주민들에게는 어떤 산맥보다도 멀고 높았을 테지요.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대상이 달라 보인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개화기 무렵의 조선은 서양인들의 눈에는 동양적 낭만과 지리적 고립감으로 궁금함을 일으키는 대상이었을 겁니다. 이사벨라 비숍이라는 영국 여인이 19세기 후반인 1894에서 1897년 사이에 조선을 방문해 쓴 여행기인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에서 묘사한 ‘은둔과 미지의 나라’라는 표현은 온전하게 여행자와 외지인의 시각입니다. 일회적인 시각이었기에 조선인들, 특히 여성들의 삶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서슴없이 쓸 수 있었을 겁니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은 산골 마을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회룡포라는 이름을 낯설어하고, 이곳 사람들의 삶을 엿보려고 하는 저의 야트막한 궁금함 역시 일회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통나무로 다리의 기둥을 세우고 철제로 만든 널빤지를 잇대어 만든 이른바 ‘뿅뿅다리’를 건너 사람들 삶의 ‘안’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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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포 마을로 들어가는 뿅뿅다리

타인의 호기심은 새롭지만 깊이가 없습니다.

호기심은 새로운 것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이기는 하지만 현지인들의 삶을 오롯이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얇고 가벼운 것입니다. 갑오농민전쟁(1894)과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 등 극심한 혼란을 맞이했던 당대의 조선을 바라보던 서양 여인의 눈에는 조선 민중의 삶이 어떻게 느껴졌을까요. 아시아의 끄트머리에 있는 미개한 이민족으로 이해되지 않았을까요.
똑같은 대상을 현미경으로 보는 것과 망원경으로 보는 것은 확연히 다릅니다. 우리가 보는 우리의 역사와 강력한 제국주의의 혜택을 두루 누리며 여행을 다녀간 영국 여인의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탓하거나 두둔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곳을 찾으면서 느끼는 궁금함이 서양 제국주의의 정점을 살았던 영국인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도시 사람이 지니는, 시골 섬마을에 대한 변변치 못한 관심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거두게 한 것은 70대로 보이는 할머니를 만나면서입니다. 

벼가 떠난 곳에 파란 보리가 자라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두르고 밭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을을 건너와 파란 잔디처럼 보이는 밭에 시선이 이끌려 따라와 보니 보리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보리를 실제로 보니 신선하고 새로웠습니다. 누렇게 익은 수확 철의 보리와 다르게 청색의 보리는 이국적인 느낌이 들기까지 합니다.
‘혹시 보리가 맞나요?’ 묻자, 할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몇 마디 이 지역 특유의 말씨로 대꾸를 하십니다. 10월쯤에 심어 아직은 푸르지만 내년 여름 나기 전에는 누렇게 여문 보리를 수확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추위가 더 오기 전에 자라야 겨울을 나고는 수확이 가능하다고 말을 덧붙이십니다. ‘보리는 겨울을 이겨내는 작물인가요?’라고 되묻는 제 질문에 할머니는 대꾸도 안 하십니다. 무심하게 돌아서 도리깨로 참깨를 터는 할머니의 몸짓이 농촌에 대한 저의 무지를 두들기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보리는 겨울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겨울을 보내며 자라는 것이 맞겠지요. 단순히 외지인의 호기심만으로 이 마을 사람들의 내력을 알 수는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듭니다. 어느 영국 여인의 여행기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졌던 개화기 조선인들의 삶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삶은 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스며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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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제게 항상 ‘늦은’ 계절입니다.

한때는 여름의 끝이 가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요. 바다의 강렬한 파도의 표면에 부딪혀 꺾이는 햇살에 취해 있던 이십 대에는 그랬습니다. 그리고 어느 무렵에는 가을은 겨울이 오는 길목쯤으로 여긴 적도 있습니다. 겨울의 냉정한 추위와 바람이 저의 목덜미를 움츠리게 하는 그 유폐가 좋아지던 때였지요.
사람이 싫어지고 정신이 황폐해졌던 서른 초반 무렵이었습니다. 당신을 향해 더 들어갈 수도 없고, 더 나올 수도 없어 세상 고민을 모두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적이 있었지요. 당신이 한 번쯤 뒤돌아보기를 바랐으나 현실의 곤궁함으로 차마 더 다가가지는 못할 때였습니다.
11월은 가을을 담기에 알맞은 모양을 하고 소백산맥 자락을 따라 널려있습니다. 가을이라고 느끼는 순간, 가을은 어느새 깊이 다가와 있어 항상 늦가을이었고, 가을이 끝나는구나, 생각하는 순간 가을은 먼저 계절을 건너가 있어 늦가을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예천의 국도에 들어서는 순간 어디에나 있는 햇살처럼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당신과의 첫 여행이 이 근처였다는 것을 햇살 속에서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또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었죠. 그때 우리가 서로 다르게 읽었던 한 편의 시도 생각이 납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방향이 달랐던 것이었겠죠.
이 시에 나오는 ‘침묵’에 대해 저는 상대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말했고, 당신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행위라고 말했었죠. 무엇이 되었든 당신이 없는 지금은 이미 늦은 언어들입니다. 가을은 제게 항상 늦가을이었듯이 말이죠. 두서없는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읽었던 시 한 편을 동봉합니다.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_ 강은교, <사랑법> 중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