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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9시의 커피] 삶을 삶답게 ‘사부아 비브르’ 커피를 건네며

커피 볶기의 균열, 생의 균열

“나는 아침상에 더할 수 없는 벗을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다.
커피를 빼놓고 그 어떤 것도 좋을 수가 없다.
한 잔의 커피를 만드는 원두는 나에게 60여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가르쳐준다.”
_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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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로스팅. 사실 작년에 했던 로스팅과 다를 바 없지만, ‘첫’은 그것을 왠지 특별하게 만들고 설렘을 선사한다. ‘맨 처음의’라는 뜻의 관형사가 주는 단상이 그렇다. 이 관형사는 체언 앞에 놓여 그것을 꾸며 줄 뿐이지만,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마법을 선사한다. 물론 이는 마음이 빚은 감정이지만, 그래서 더 신경을 썼다. 

로스팅에 스며드는 정체성

알다시피, 한 잔의 커피에는, 커피 볶는 과정이 우선한다. ‘로스팅(Roasting)’ 혹은 배전(焙煎)이라 불리는 이 과정은, ‘煎(달일 전)’이라는 단어가 드러내듯, 로스터에겐 마음을 졸이거나 애태우는 과정이다. 마음을 들들 볶는다고 잘 될 일도 아니요, 애를 덜 쓴다고 안 될 일도 아니지만, 한 잔의 커피를 추출하기에 앞서 로스팅은 수양을 쌓는 방편이기도 하다. 커피콩의 성격에 맞춰, 커피 마시는 사람의 취향 혹은 가게가 드러내고 싶은 정체성 등이 로스팅에 스며든다. 어떻게든 볶는 사람의 마음도 덧붙여진다. 

그러니, 번갯불에 콩 볶듯 로스팅을 한다면, 그건 커피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볶기를 잘해야 커피콩이 살고, 커피가 산다. 나도 산다. 아무리 좋은 커피콩이라도 볶기에 실패하면, 그 커피는 ‘꽝’이다. 그러니까, 볶는 것은 기술이면서 마음이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온도에서, 열 조절은 어떻게, 로스팅 강도 등등을 결정하는 건, 고차방정식과 다름이 없다. 커피 볶기는 그렇다. 끊임없는 선택의 결과다. 인생과 다를 바 없는.  

그렇게 새해 첫 볶기였지만, 균열이 생겼다. 으악, 열 조절을 제대로 못했다. 투입 온도도 그렇고, 화력을 조절하면서 생긴 균열이었다. 표면이 징징 울고 있었다. 원두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태클이 걸렸다. 뽀깃뽀깃, 균열이 생긴 커피콩을 보자니, 마음이 쓰라렸다. 열이 콩을 팽창시켰으나, 콩이 그 열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콩은 예민하다. 단단한 녹색의 콩 같지만, 그 표면만으로 단순 평가해선 안 된다. 열과 결합하면 더욱 예민해진다. 자라는 동안 콩이 품은 각종 성분이 열 속에서 분해되고 재조립된다. 그 성분들의 재조합을 가장 최적으로 만드는 일, 그것이 또한 커피볶기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재조합을 방해한 것이다. 나와 커피콩 사이의 케미는 깨졌다.    

예고 없이 찾아온 균열과 얼룩

나는 죄인이 되고 말았다. 적정한 열로 콩을 다독이지 못한 죄. 향미 좋은 커피의 탄생을 방해한 죄. 무엇보다 콩의 생애에 균열을 가한 죄.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커피야, 미안해. 너의 성형(?)이 제대로 형성되기 전에 얼룩덜룩 더럽히다니.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얼룩! 우리 각자의 생에도 얼룩이 생길 때가 있다. 균열 때문이다. 이 균열은 예고 따윈 없다. 몇몇 조짐이 슬금슬금 찾아오지만, 우리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일쑤다. 커피 볶기에 찾아온 균열도 애초 예고된 것은 아니었다. 콩아, 미안하다, 사랑한다.   

커피 볶기든, 생이든, 균열을 염두에 둬야 한다. 흠결 없는, 완벽하게 표백된 볶기나 생은 없다. 그런데 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 커피 볶기의 균열은 비교적 인과관계가 뚜렷하다. 온도나 열 조절 등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때론 부족한 기교나 정성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생의 균열은 종종 인과관계나 맥락 없이 닥친다. 전생이라든가,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아온 총합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기습적으로 닥칠 때가 많다.
물론 생에 그닥 타격을 주지 않는 균열도 있다. 얼룩이 작고, 금세 지울 수 있는 경우. 그렇담, 다행인 게지. 그게 아니라면, 균열은 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 누군가는 무방비 상태에선 대책 없이 쓰러질 수 있다. ‘준비’까지는 아니지만, ‘염두’에 둬야 한다. 어느 순간 균열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 ‘일어나지 않으리란 확신’보다는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생각해야 한다. 

균열이 일어난 커피는 맛이 떨어진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균열이 일어났음을 알았지만, 슬슬 볶았다. 나만 마실 생각으로. 입에 머금고 넘겼다. 역시나 커피 향미가 제대로 살지 않았다. 균열이 절대적인 이유는 아녔지만, 균열이 한몫했다.
생의 균열은 어떨까. 생의 맛이 떨어질까. 아니, 마냥 그렇진 않다. 떨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균열에 대처하는 자세에 따라 생은 달라진다. 균열이 좋은 자극이 돼서 생을 전환하거나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물론 정반대일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은 분명하다. 생의 균열은 ‘before’와 ‘after’를 구획 짓곤 한다. 같은 것을 보고 듣고 읽거나 경험해도 이전과 다르다는 것. 알다시피, ‘before’ 그리고 ‘after’ 두 단어 사이의 간극만큼, 생은 균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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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없는 생의 균열이지만 '사부아 비브르'

커피 볶기의 균열이 엉뚱하게 생의 균열까지 도달했다. 균열이 일어난 커피를 마시는 일은 좋지 않다. 그런데 그 균열은 따지자면, 나 때문이었다. 커피 자신이 원하거나 자초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생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거나 자초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균열이 단순 얼룩이 될지, 평생의 흉터가 될지 모르겠지만, 참고 마시라. 볶다가 균열이 일어난 커피라도. 누군가에게 팔거나 대접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생의 균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별이 지는 어제, 태양이 뜨는 오늘. 균열이 일어난 커피는 거부할 수 있지만, 균열이 일어난 생은 거부할 수 없다. 

사부아 비브르(Savior vivre). ‘삶을 즐기며 삶답게’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 말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니 그 뜻을 알고 난 뒤, 맛있는 커피를 온몸으로 흡입한 듯 저릿했다. ‘대박 나세요’라는 흔한 말 대신, ‘부자 되세요’라는 천박한 말 대신,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삶을 삶답게 누리라는 말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서 사랑하며 사는 것. 더불어 슬픔, 아픔, 고통, 불행마저 토핑해서 복작복작 잘 버무리는 것. 또 맛있는 것을 나눠 먹고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싱거운 이야기에 낄낄대며 배를 잡고 실컷 웃고 헤어지면서 “안녕, 또 만나”라고 건네는 것. 또 다른 좋은 삶이 있다면 <밤9시의 커피>에 들러 얘기해 달라. 당신에게 균열 없이 잘 볶은 ‘사부아 비브르’ 한잔 건네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좋은 커피와 이야기를 곁들인 카페

사람은 참 신기하다. 커피를 마신 입에서 시와 노래가 나온다.(물론 육두문자와 혐오, 차별의 언어도 내뱉지만.) 그래서 커피는 한 편의 문학이다. 커피 한 잔, 그 속에 삶이 녹아있음을 향기롭게 부채질하고 싶다. 새해 첫 로스팅이 준 단상으로 문을 열고 당신을 환대한다. 좋은 커피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인 카페를 곁에 둔다는 건 축복이다. 그 카페가 <밤9시의 커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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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9시의 커피’는 다정하고 환대가 넘치는 가상의 카페입니다. 불면을 부르는 커피가 아닌, 분주한 일상이지만 늘 깨어있는 존재로 남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을 상징합니다. ‘음료, 그 이상’인 커피를 매개로 가상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함께 상상하고 공감합니다. <편집자 주>

글 | 낭만(김이준수)
낭만 님은 펫로스(Pet loss) 추모, 애도 서비스 등을 아이템으로 한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말을 현실화하고자 천천히 걷고 있습니다.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을 썼고, 《그림자아이가 울고 있다》 《청소년 스마트폰 디톡스》 《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 등에서 스토리텔링을 맡았습니다.
[밤9시의 커피] 삶을 삶답게 ‘사부아 비브르’ 커피를 건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