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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생활의 풍경, 자연의 감정

짜장면집과 빌딩들, 그리고 호수

[부치지 못한 편지] 생활의 풍경, 자연의 감정 |

동네에 눈길을 끄는 식당이 있습니다.

제가 이사 온 지가 10여 년쯤 되니까, 이 식당은 자영업의 평균 영업 기간과 비교해보더라도 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곳입니다. 중국음식점이 흔히 그렇듯, 이곳도 외관은 비슷합니다. 대여섯 개로 구분된 유리문이 메뉴판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로는 붉은 차양이 식당의 출입문을 알려줍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붉은색의 카펫이 바닥에 깔린 이 작은 식당에서는 중국 음식을 팔고 있습니다. 동네 골목의 ‘짜장면집’이 그렇듯이 이 집도 짜장면과 짬뽕을 대표적인 메뉴로 탕수육, 양장피, 깐풍기 등이 유리창을 메뉴판 삼아 새겨져 있습니다.  

‘홀에서 드시면 2000원.’

이 식당이 희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 어느 날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대략 삼 년 전쯤부터였을 겁니다. 코로나로 식당이 잘 유지되지 않았던지 짜장면 가격을 대폭 깎아 팔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 사 먹으면서 얄팍한 호기심을 갖게 됐습니다. 원래 가격인 4500원과 내린 2000원의 차이를 분석하기 시작한 거죠. 가격이 어떤 품질의 차이를 보이는지 의심하자 짜장면 맛이 뭔가 바뀐 것 같았습니다. 가격이 낮아졌으니 양과 재료가 줄어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주민들 사이에서 식당에 대한 유쾌하지 못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을 겁니다.  

한동안 그 식당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에 그곳을 지나다 보니 식당은 전혀 다른 외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열 평 남짓한 식당을 반으로 쪼개어 버린 겁니다. 한쪽은 짜장면집을 운영하면서 다른 한쪽은 해장국과 안주를 파는 실내포장마차로 바뀌어 있었죠. 두 개의 공간을 구분하는 것은 대나무로 만든 긴 발이었습니다. 반값도 안 되는 짜장면을 내놓았던 주인의 절박한 마음을 알면서도 몇 그릇 팔아주지도 않던 주제에 막상 식당이 바뀌자 어딘가 허전하고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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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이 변화하는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10년간 식당이 변화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에 씁쓸함이 남았습니다. 처음 자영업에 뛰어들었던 주인장의 패기와 숙련의 시간이 변질되고 무너지는 게 보였기 때문이지요. 우리 사회가 변화하는 한 모습이 응축되어 있어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분명 그 변화의 모습에는‘자본주의가 다 그렇지, 뭐’라고 편하게 치부해 버리기에는 안타까운 생각을 버리기 어렵더군요. 우연히 담배를 피우고 있는 주인의 모습은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무척 철학적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뜬금없는 철학 타령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철학이란 게 꼭 알아듣지 못하는 두꺼운 서적 안에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어떤 두꺼운 철학 서적의 인생론보다도 주인아저씨의 표정의 골은 깊었습니다. 

식당 주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았습니다.

고심 끝에 가격을 내리고, 그것마저도 여의찮아 가게를 반으로 쪼개기까지 괴로운 시간을 경험한 것은 어쩌면 이 식당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수익을 더 창출하려는 식당 주인의 욕구를 부정하거나 탓할 수는 없습니다. 지나치게 탐내거나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했던 욕심은 아니기 때문이죠. 그건 그냥 욕망입니다. 좀 더 잘 하고 싶다는 욕망. 자기애를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감정입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욕망을 무엇을 간절하게 바라고 원하는 마음이라고 풀이합니다. 식당이 본래의 모습대로 유지되기를 바랐던 것 또한 제 욕망입니다. 이 식당 주인의 결정은 단순한 욕망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더 복잡하고 철학적으로 보입니다. 임대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가게를 내놓는 자영업자들의 고민도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영업을 해오던 기존 가게의 공간을 쪼개면서까지 영업을 이어가려는 식당 주인의 생각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사람에게까지 어떻게 사는 게 옳은 것이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사거리의 풍경은 항상 바뀝니다.

발걸음을 옮겨 대로변의 사거리로 나서니 이 복잡한 곳에도 봄은 와 있었습니다. 한때는 자연이 인간들의 배경이 되어주었죠. 물론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풍경의 의미는 바뀌고 있습니다. 이제는 바뀐 계절을 느끼기 위해 동네를 구경하지는 않습니다. 가까운 근교를 찾거나 산과 호수를 찾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도시는 자연을 배경으로 하지 않습니다. 바쁘게 살아야 하고, 악다구니를 쓰더라도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자연을 도심 밖으로 밀어내기에 급급하죠. 가로수마저도 광고물을 걸어 두는 버팀목으로 더 쓰임새가 있고, 심지어는 국회의원의 의정 활동을 홍보하는 현수막의 지킴이로 전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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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의 변화는 봄빛보다 화려합니다.

항상 붐비는 대로변 사거리에는 건물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습니다. 신축 건물에서부터 리모델링한 건물, 오래되었지만 건물의 외벽만 교체한 건물들로 항상 붐비고 변화하는 중입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있습니다. 건물마다 치과는 한 군데씩 꼭 있고, 약국은 두 군데나 있는 곳도 있습니다. 신축 건물일수록 병원이 들어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아픈 것도 있겠지만 우리 시대의 자본이 어디로 집중되는지를 보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흥미롭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합니다. 대자본이 집중된 고층빌딩을 찾아, 가장 많은 교육비가 드는 의사들이 개원한 병원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그 앞으로는 몇 년 후에는 의과대학에 가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이며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들이 즐비합니다.  

차를 몰아 동네를 조금 벗어나면 호수를 만납니다.

한참을 눈여겨보던 물가에 잔잔히 물결이 일어납니다. 아마도 물 밑 어디선가 물고기들이 움직이나 봅니다. 파문이 밀려나는 곳을 좇아 시선을 따라 흘려보냅니다. 하나의 파문이 멈추면 다른 파문을 찾아 또 다른 시선을 흘려보내 봅니다. 지난겨울에 버드나무의 밑둥치를 꽉 붙잡고 얼어있던 물길이 풀리고 있습니다. 얼음에 갇혔던 시간이 물가에서부터 호수의 중심으로 봄을 옮겨가며 풀리고 있습니다. 하얗게 뭉쳐진 겨울의 입김이 투명해지면서 녹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새기게 됩니다. 물길의 파문이 호수 가장자리라고 해서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 옆에 와 있는 봄이 저 물길을 또 데리고 또 어디론가 흐르고 있을 테니까요. 

같은 장소를 다른 계절에 다시 찾아옵니다.

지난겨울에 앉아있던 이 벤치에 계절이 바뀌는 순간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찾았습니다. 오래된 습관입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다시 찾는 공간이 자연의 일부일 때 좋은 점들이 훨씬 많습니다. 무엇보다 주변 변화를 눈여겨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풍경을 구성하는 계절의 모습은 사람으로 치면 감정과 같은 것들입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것들이죠. 한 사람에 대하여 깊은 애정이 없다면 그 사람의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계절은 미리 시간을 예약하고 그 장소에 멈춰서 있는 듯하지만 매 순간 바뀌는 자연의 감정들입니다.  

자연의 풍경을 즐기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들이 있습니다. 도심의 배경을 잊어버릴 것. 그리고 바람과 함께 아무 말이나 속삭여 볼 것. 빌딩이 풍경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을 위해 꽃나무의 꽃들이 어떻게 생기고 자라는지, 바람이 나무들에게 귓등으로 알려주는 것처럼, 아이들의 눈가에 가만가만히 속삭여주는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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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