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서평
2024-05-10   0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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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길’은 ‘냇가’를 돌아 ‘나무’로 이어진다

고향의 어린 시절을 그리는 시 3편

[문학산책] 고향의 어린 시절을 그리는 시 3편 |

어릴 적 살던 동네를 다녀왔다. 재개발이 이루어져 동네는 많이 변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은 백제의 고분으로 알려진 토성이 유일했다. 산업화 이후에 도시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흔히 시골이라고 부는 곳을 고향으로 두지 않았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개발과 재개발 속에서 고향의 원형을 다시 찾기는 어려울 듯하다. 고향은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터전이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는 회귀의 대상이 된다. 농촌 체험을 이벤트로 하는 행사가 열리고, 옛것의 모습을 보존한 곳이 핫플레이스가 되는 세상이다.  

나고 자란 곳을 떠나면서 사람들은 커나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고향을 떠올리게 되는 일은 어찌 보면 원초적인 감정일 것이다.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은 그 공간을 재구성하고 복원한다. 고향의 기억에는 물질적 결핍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헤어짐도 있었을지 모른다. 유년의 모든 체험이 묻혀 있는 ‘그곳’을 회상하고 있는 시를 읽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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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첫사랑을 잃어버린 ‘길’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혼자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낡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 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_ 김기림, <길> 

바다가 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시인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기억한다. 유년을 기억하는 시의 첫 문장에서 시인은 길을 상실의 공간으로 옮겨 놓는다. 그냥 길이 아니라 ‘그 긴 언덕길’이다. 어머니가 상여에 실려 떠나간 곳을 바라보는 어린 시절의 시인은 한참 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유년의 길은 상실의 공간으로 각인된다.  

첫사랑을 잃어버린 곳도 그 길이다. 첫사랑을 ‘조약돌처럼’이라고 표현한 데서 풋풋한 소년의 순수한 사랑이 느껴진다. 작고 동글동글한 조약돌은 강의 하류에 모여 있다. 물살이 몰려가는 상류와 달리 하류는 하천의 아래쪽이라는 공간의 의미 이외에도 기억의 밑바탕이라는 정서적인 곳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처럼 시인에게 길은 어린 시절 상실의 기억으로 들어가는 회상의 입구이면서 정서의 맨 밑바닥을 차지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소중한 사람들이 떠난 그 길에서 어린 화자는 혼자 시간을 보내다 노을이 스밀 무렵에야 돌아온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를 상실감을 견디는 모습이 선명히 그려진다. 마음이 몸서리쳐질 정도로 아픔을 겪은 화자는 감기를 앓고야 만다.  

이때 언급된 감기는 일종의 ‘입사식(入社式 : Initiation)’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장기를 거쳐 어른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인 입사식은 문학에서 어린 시절을 벗어나는 장치로 활용된다. 어른이 된 화자는 버드나무 밑에서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계집애, 이야기’를 멍하니 기다린다.
마지막 행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시인이 정말 쓰고 싶었던 내용은 그 시간과 버드나무가 있는 ‘지금’이 아닐까.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는 버드나무 아래의 공간과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주는 어둠이 찾아오는 시간을 시인은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기림(1908~?) 시인은 한국 현대문학에서 모더니즘의 문학적 이론을 들여온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다. 감상주의적 시풍을 배격하고 감정을 최대한 절제해야 한다는 주지주의 이론을 설파한 문학적 경향을 고려하면 이례적이지만 매우 아름다운 시이다. 어떤 이는 시가 아닌 수필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유년의 기억은 문학의 장르와 이론의 경향성을 훌쩍 넘는, 모든 생각의 원형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김기림 시인은 해방공간에서 활동하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 연도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7월 냇가에서 행복한 낮잠  

내 유년의 7월에는 냇가 잘 자란 미루나무 한 그루 솟아오르고 또 그 위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내려와 어린 눈동자 속 터져나갈 듯 가득 차고 찬물들은 반짝이는 햇살 수면에 담아 쉼 없이 흘러갔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착한 노래들도 물고기들과 함께 큰 강으로 헤엄쳐 가버리면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은 미루나무 손들을 흔들어 차르르 차르르 내 겨드랑에도 간지러운 새잎이 돋고 물 아래까지 헤엄쳐가 누워 바라보는 하늘 위로 삐뚤삐뚤 헤엄쳐 달아나던 미루나무 한 그루.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마 미루나무야, 귀에 들어간 물을 뽑으려 햇살에 데워진 둥근 돌을 골라 귀를 가져다 대면 허기보다 먼저 온몸으로 퍼져오던 따뜻한 오수*, 점점 무거워져 오는 눈꺼풀 위로 멀리 누나가 다니는 분교의 풍금소리 쌓이고 미루나무 그늘 아래에서 7월은 더위를 잊은 채 깜빡 잠이 들었다.
*오수 : 낮잠
_ 정일근, <흑백 사진 – 7월> 

정일근(1958~) 시인의 아름다운 한 시절에 관한 수채화 같은 시이다. 수채화라고 표현한 이유는 쉼표를 적절히 사용하고 시어를 반복해 산문시이면서도 호흡이 가볍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음성 상징어를 활용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생동감이 전해진다. 동요의 한 구절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를 인용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선명히 환기한다. 특히 감각적 이미지의 섬세한 조합은 물감으로 그린 깨끗한 풍경화 한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과수원을 지나온 달콤한 바람’, ‘간지러운 새잎’, ‘햇살에 데워진 둥근 돌’, ‘누나가 다니는 분교의 풍금소리 쌓이고’ 등의 감각적 표현은 시인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현재로 호출한다.  

제목인 ‘흑백 사진’은 시인의 기억을 집약하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지만 현재에서 과거를 떠올리는 시의 시간을 고려할 때도 잘 어울린다. 시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냇가는 누나가 다니는 분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어느 농촌의 시골 마을이었음이 틀림없다. 더구나 풍금소리는 평화로운 여름 한때를 떠올리기에 적절한 이미지로 읽힌다. 이렇게 행복한 유년을 기억하는 시인의 시어는 맑고 깨끗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허기보다 먼저 찾아온 오수에 눈꺼풀을 감는, 학교도 들어가기 이전의 꼬마 아이의 맑디맑은 감정의 편안함과 따스함이 몰려오는 듯하다. 혹시 행복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배고픔의 결핍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년은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다. 더 큰 상처를 얻기 이전의 시절이었고, 상처라는 말을 알기 이전의 시절이었다.  

눈을 감고 시의 한 장면을 상상해 보면 순간적으로 달콤한 낮잠이 밀려온다. 억지로 의식하지 않아도 밀려오듯이 스며오는 감정이 행복이 아니면 어떤 감정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유년을 품어주었던 ‘하류의 나무’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_ 이건청, <하류> 

이 시에서 어린 시절을 불러내는 시어는 나무이다. 어린 시절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언급된 두 편의 시들과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거리 개념이 들어간 부사어의 사용과 과거 시제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화자인 ‘나’가 시의 표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위의 두 편의 시들과 달리 어른이 된 화자가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서 독립적인 시공간의 상황을 제시하고 있을 뿐, 깊이 개입하고 있지는 않다. ‘거기 나무가 있었네’라고 시작하는 이 시의 첫 문장은 독자에게 일정한 거리를 느끼게 한다. ‘거기’는 일반적으로 공간적 거리감을 표현하지만 이 시에서는 시간적 거리감도 함께 표현한다. 어린 시절의 어느 한 공간이 ‘거기’로 압축되어 있다.  

이건청(1942~) 시인의 유년은 어쩌면 독립된 시공간에서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을지 모른다. 시가 이렇게 표현되면 분명한 장점이 있다. 현재와의 시공간적 간격을 차단함으로써 언제 읽어도 변하지 않는 유년의 한순간이 독자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유년의 기억은 어떤 순간보다도 시인의 주관이 깊이 간섭할 수 있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는 부분에서 제시된 ‘아이’가 화자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된다. 1인칭 ‘나’를 3인칭 ‘아이’로 표현한 이유는 지나친 자신만의 기억과 생각을 자제함으로써 유년의 일부를 온전히 복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나의 기억에 함몰될 수 있는 내용을 보편화할 수 있는 표현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기억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이 차별화되어 읽힌다. 일관되게 선택한 과거시제의 서술어들은 시의 시간성을 유지해지는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반복된 리듬을 만든다. ‘거기 나무가 있었’고 ‘모든 대답이 있’던 기억을 가진 사람의 유년의 노을빛은 ‘금관 악기 소리로 퍼’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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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