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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처연함과 매혹의 노래

‘하룻밤 사랑’을 표현하는 두 시선

사랑을 애절히 말하는 노래가 범람한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자장(磁場) 안에서 살아간다. 잃어버린 사랑도 잊고 되찾은 사랑도 있다. 막 시작하는 사랑도 있고, 아련한 추억이 된 사랑도 있다. 비단 노래만이 아닐 것이다. 서정시의 본질이 낭만에서 시작됐다면, 낭만의 벼리는 사랑이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형제 간의 사랑에서부터 이루지 못할 사랑, 해서는 안 될 사랑도 있으리라.  

사랑 타령이나 할 정도로 요즘 삶이 여유롭지는 않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렇게 팍팍하게 살려고 하는 이유도 다 사랑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떤 분의 말씀대로 ‘무엇 때문에’ 사랑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게 쉽지도 않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생각하면 멈춘 듯하던 심장이 다시 뛰기도 한다. 젊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사랑이 끼어들 틈이 없다. 더 이상 타인에 대한 관심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늙는다는 것이 슬픈 게 아닐까 싶다. 자기 몸이 아프기 시작하는데 타인에 대한 관심이 있을리 만무하고 주변은 모두가 귀찮고 하찮은 것이 될 테니까.
특히 ‘하룻밤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 아닐까 싶다. 이성에 대한 강렬한 유혹과 매혹이 만날 때만이 그걸 가능하게 할 테니까. 가슴에 열정이 남아있는 모두가 그런 일탈을 꿈꾸는 것도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될 테니 말이다. 읽었던 책에서 ‘하룻밤 사랑’에 관한 우리 시 두 편을 꺼내 본다. 시공간을 달리 하는 두 편의 시는 개인들의 고귀한 연민과 민족의 아픔이 느껴지기도 하고 방황하는 청춘의 뜨거운 여름이 드러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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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사랑의 처연함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 가시네야 / 나는 발을 얼구며 /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 눈포래를 뚫고 왔다 / 가시내야 /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달 전이면 /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 두 낮 두 밤을 두리미처럼 울어 울어 /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 가시내야 /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 줄께 /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_ 이용악, <전라도 가시내> , 시집 《오랑캐꽃》, 1947

일제의 수탈이 정점을 치닫던 1930~40년대에 우리 민족은 살아남기 위해 북간도로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이 시에는 고향이 전라도인 여자와 함경도의 남자가 북간도의 술집에서 만난다. 여자는 북간도 주막에서 술을 따르는 일을 하는 ‘눈이 푸르고 얼굴이 까만’ 젊은 여인이다. 나라를 잃고 고향을 떠난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술막’이란 말 그대로 술 파는 주막. 숙박업소에서 밥도 팔고 술도 파는 일을 하는 여자가 여염집 여인일리는 없다. 그렇게 작부 생활을 하는 여자와 함경도 남자가 술잔을 사이에 두고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며’ 서로의 삶의 이력과 신산한 세상살이를 풀어 놓는다.
그들의 하룻밤 사랑은 처연하다. 청춘의 열정이나 방황이 개인의 선택에서 비롯되지 않기 때문이다. 민족의 비극과 상처는 당대 젊은이들의 삶을 부초처럼 흔들리게 했고 그 속에서 남쪽의 여자와 북의 남자가 만난 것이다. 그렇게 사랑을 나눈 그들 앞에는 재회의 약속이 있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서로 안타까워하지만 훗날을 기약할 수 없는 그들의 사랑은 비단 그 둘만의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일제 강점기에 있던 이 민족 이 땅의 청춘들이 그렇게 사랑하고 헤어졌으리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라고 마지막 인사를 독백으로 매듭짓는 그 사랑이 하룻밤뿐이었다 하더라도 누가 그들의 사랑을 가볍고 하찮은 거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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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방황하는 청춘의 사랑

더 춥다 / 1월과 2월은 / 언제나 저녁부터 시작되고 / 그 언저리 / 불도 들지 않는 방 / 외진 몸과 외진 몸 사이 / 하루에도 몇 번씩 / 높은 물이랑이 친다 /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 집 나선 지 이태째라는 참머리 계집은 /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 부서진 손톱으로 / 달을 새긴다 / 장판 깊이 박히는 수많은 달 / 외항을 헤매이는 고동소리가 / 아련하게 문턱까지 밀리고 / 자거라, 깨지 말고 꼭꼭 자거라 / 불 끄고 설움도 끄고 / 집도 절도 없는 마음 / 하나 더 / 단정히 머리 빗으며 / 창밖 어둠을 / 이마까지 당겨 덮는다
_ 최갑수, <밀물여인숙1>, 《문학동네》, 1997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시 속의 남자는 항구의 바다를 찾아 떠돌다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90년대 후반에 발표된 시기를 고려하면 <전라도 가시내>의 상황과는 대조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던 시절임을 감안할 때, 이 젊은 남자의 방황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청춘의 아픔을 안고 바닷가를 한 번 찾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바다의 항구는 머무름과 떠돎의 상황이 공존하는 곳. 항구에 잠시 정박해 있는 배는 정착과 방황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그 언저리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난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라고 자신을 알리는 여자 역시 집을 떠나와 방황하는 중이다. 그들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시선이 멈추는 것은 그들이 하는 행위이다. 서로를 오랫동안 알아왔을 리 없는 그들은 겨울 밤 바닷가 여인숙에서 서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하루에도 몇 번씩 / 높은 물이랑이” 치는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아마도 불면증에 시달렸을 여자에게 남자는 ‘설움’까지 꺼주며 ‘집도 절도 없는’ 외진 마음을 위로하며 서로를 보듬어 안는다.  

연작시로 발표된 이 시가 매력적인 것은 ‘하룻밤 사랑’을 과장하거나 쓸데없는 낭만적 포즈를 취하지 않는 데에 있다. 신자유주의가 활개를 치던 ‘90년대 청춘이 감당하려 했던 젊음의 상처가 여인숙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담담하지만 쓸쓸히 묘사된다. 세 편으로 된 연작 중 일부를 인용해 상황을 재구성하면 이런 상황은 또렷이 드러난다. “창밖을 보다 말고 / 여자는 가슴을 헤친다 / 섬처럼 튀어오른 상처들 / 젖꽃판 위로 / 쓰윽 빈배가 지나고 / 그 여자, 한 움큼 알약을 털어넣는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여자의 상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깊고 오래 됐다. 서로가 서로를 안고 있지만 ’하룻밤‘이 끝나면 곧 헤어질 사랑은 현대 사회가 적나라하게 추구한 익명성의 핵심이다. 그 여자의 몸을 안고서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네 몸을 빌려 / 한 계절 꽃피다 갈 수 있을까”  

그들의 사랑이 경박하지도, 불결하지도 않은 이유는 서로를 대하는 진정성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그들이 곧 우리의 젊음이었고 우리의 과거였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글 | 오형석
[문학산책] 처연함과 매혹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