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카페의 서재
[문학산책] 흥얼흥얼~ 추억이 뭉게뭉게

시는 노래가 되었고 노래는 흘러갔다

아름다운 시는 아름다운 노래를 이끌어낸다. 우리 문학에도 시가 노래가 된 경우가 많다. 뭐라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노래 한 구절이 종일 입 안을 맴돌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노래는 의식 속에서 떠오를 때보다 무의식에서 솟아오를 때가 더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 시절의 한 순간이 노래 한 구절로 규정되는 순간, 살벌한 이 세상에 노래와 시가 아직도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증명해 낸다. 

한 시절을 함께 한 노래는 세대의 가치를 나눌 때 주요한 기준이 되는 경우도 있다. ‘당신은 그 시절에 어떤 노래를 듣고 살았는가’에 관해 대화가 이어지면 우리는 추억을 공유하게 된다. 그래서 시는 노래가 되고, 노래가 된 시절은 추억이 된다. 우리들의 기억에 스며있는 노래 한 소절이 어떤 시에서 비롯된 된 것인지 확인해보는 일은 마치 지나간 사진 한 장이 붙들고 있는 시간을 더듬는 것과 마찬가지이리라.
 

문학산책-1.JPG

지하의 울부짖음, 생명을 알리는 노래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 누구의 마 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_ 나희덕 시, 안치환 노래, <귀뚜라미>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나희덕 시인이 시를 쓰고 안치환이 노래를 부른 <귀뚜라미>는 시의 전문성을 대중성을 기반으로 한 노래가 행복하게 확장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랑 노래가 대다수인 가요계에서 문학의 서정이 노랫말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연합노래패 ‘새벽’에 참가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안치환은 시를 노래로 바꾸는 작업을 누구보다 공들여 해왔다. 이 곡 외에도 류시화 시인의 <소금인형>과 정호승 시인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등을 노래한 바 있다. 

순결한 목소리로 자유를 외치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 오직 한가닥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 민주주의여 만세 / 살아온 저 푸른 자유의 추억 / 되살아 나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에 / 신새벽에 남몰래 쓴다 / 타는 목마 름으로 / 타는 목마름으로 / 민주주의여 만세 /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 민주 주의여 만세
_ 김지하 시, 김광석 노래, <타는 목마름으로> 

고인이 된 김광석은 통기타 하나만으로도 우리를 세상 밖으로 호출하는 힘을 가졌다. 때로 시무룩해 보이는 그의 눈빛이 하모니카의 선율과 더해질 때면 깊고 깊은 노래의 심연으로 우리를 끌어들였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타는 목마름으로’가 연주될 때, 그 뼛속을 긁는 듯한 음색에는 자유를 향한 아우성이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배어 있었다.
소극장 공연장에서 듣는 그의 음성은 세상의 아름다움이었고 청춘의 절규였다. 삶의 모든 슬픔을 중저음으로 녹이는 듯한 그의 노랫소리에 우리 세대는 위안을 얻었고 아프지만 살아있음을 느꼈다. 시인 김지하가 민주주의를 애타게 외치던 시절의 절박함이 김광석의 목소리로 ‘타들어가듯이’ 재탄생했다. 
 

문학산책-2.jpg

노래의 첫 구절만으로도 가을을 삼켜버린 노래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 낙엽이 쌓이는 날 / 외로 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 낙엽이 흩어진 날 / 헤매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모든 것을 헤매인 다음 보내드려요 / 낙엽이 사라진 날 /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 아름다워요
_ 고은 시, 김민기 노래 <가을 편지> 

이 시는 고은이 1970년대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기 전의 어느 날의 감성쯤으로 읽히고 들린다. 가을이라는 어감이 주는 쓸쓸함을 노래의 첫 구절만으로 감싸 안는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라는 멜로디 한 마디는 어느 새 우리를 낙엽 지는 가을 거리로 내모는 힘을 발휘한다.
‘모르는 여자’가 누구인들 그 가을 한 순간에 아름답지 않겠는가. 모든 낯선 관계는 익명의 힘으로 우리를 들뜨게 한다는 사실을 시인은 낙엽이라는 편지를 받아드는 순간 알아차린 지도 모른다. 그 미묘한 설렘의 바닥에 깔리는 김민기의 메마른 음성은 모든 시는 노래가 될 때 울림이 더한다는 진실을 터뜨려낸다.  

인간 세상의 무거운 옷을 벗고 자연을 노래하다

내 하나의 목숨으로 태어나 / 바다에 누워 / 해 저문 노을을 바라본다 / 설익은 햇살이 따라오고 / 젖빛 젖은 파도는 / 눈물인들 씻기워 간다 / 일만(一萬)의 눈초리가 가라앉고 / 포물(抛物)의 흘러 움직이는 속에 / 뭇 별도 제각기 누워 잠잔다 / 마음은 시퍼렇게 흘 러 간다 / 바다에 누워 / 외로운 물새가 될까 / 물살이 퍼져감은 / 만상(萬象)을 안고 가 듯 아물거린다 / 마음도 / 바다에 누워 / 달을 보고 달을 안고 / 목숨의 맥(脈)이 실려간 다 / 나는 무심(無心)한 바다에 누웠다 / 어쩌면 꽃처럼 흘러 가고 / 바람처럼 사라진다 / 외로이 바다에 누워 / 이승의 끝이랴 싶다.
_ 박해수 시, 높은 음자리 노래 <바다에 누워> 

1985년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데뷔한 ‘높은음자리’가 불러 널리 알려진 이 시는 강렬한 비트와 남녀 듀엣의 적절한 호흡이 인상적이다. 바다를 동경하는 인간의 몸짓과 욕망이 스러지는 바다의 파도와 뭇별 사이에서 점멸하면서서 애틋함을 더한다. 어느 문학평론가는 이 시에 이런 평을 달며 우리를 흥얼거리는 허밍으로 이끈다.
“화자는 뭇 별들이 제각기 누워 잠자듯 바다에 누워 바다에 실려 간다. 이제 인간 세상의 무거운 옷을 벗은 자연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외로운 물새가 되기도 하고, 꽃과 바람이 되기도 한다. 바다는 그에게서 세속의 때를 씻기우고 인간 본래의 생명원상인 자연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 시가 독자들에게 신선한 해방감으로 밀려들어 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문학성과 대중성의 행복한 만남

이외에도 상당히 많은 시들이 노래로 거듭났다. 모든 노래를 언급할 수 없기에 노래와 노랫말로 되살아난 시들을 간략히 언급한다. 정지용의 <향수>를 박인수와 이동원이 노래로 만들었다. 김미선의 <편지>를 임창제가, 김현수의 <토함산>을 송창식이 개성 있는 목소리로 노래했다. 고은의 <세노야>는 양희은이 특유의 음색과 감성으로 노래해 특별한 개성으로 남아있다. 김남조의 <그대 있음에>를 송창식이, 박두진의 <해야>를 조하문(마그마)이 개사하여 불렀고, 김동환의 <산넘어 남촌에는>을 박재란이, 고은의 <작은 배>를 조동진이, 김광섭의 <저녁에>를 유심초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문학산책-3.jpg

문자언어라는 평면의 세계에 존재하던 문학의 한 성취들이 음성언어인 노래로 거듭나면서 우리들에게 더 큰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좋은 문학이 세대를 거듭해 살아남는 것처럼 좋은 노래는 한 사람의 기억을 넘어 대중의 기억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물리적 시간을 넘어서는 기억은 다음 세대와 연결된 끈이 되기도 한다. 앞으로 또 어떤 노래를 만나 행복해할지 기다려진다.

글 | 오형석
[문학산책] 흥얼흥얼~ 추억이 뭉게뭉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