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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추운 산> <대설주의보>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눈(雪)을 위한 세 가지 변명

눈은 공중에 떠다니는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흰 결정체이다. 찬 기운을 만나야 얼기 때문에 겨울이 배경이어야 하고, 공중에서 땅 위로 낙하하는 성질로 인해 떠도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흰색의 결정체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환기하며 사람들에게 현실 너머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성탄절이 여름이었다면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낭만과 기다림은 없었을 것이며, <겨울 왕국>의 여주인공 엘사가 펼치는 동화적 서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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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떠올려 본 눈에 대한 몇 가지 이미지는 제한된 상황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흔하지 않은 가치를 확고히 한다. 눈만큼 입체적인 생각의 통로를 가지는 자연 현상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어린 시절의 눈 한 송이는 어른이 되면 불편함으로 바뀌게 되고, 녹지 않기를 바라던 마지막 잔설은 계절이 바뀌면서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새하얗기 때문에 더러워지기 쉽지만, 눈의 잘못이 아니다. 더럽히는 것은 모두 인간들의 몫이기에.

이물질로 인해 더러워진 하얀색은 변하기 않기를 바랐지만 서서히 더럽혀진 자신을 드러내는 것 같아 사람들의 외면을 받기 쉽고, 얼음과 비교되며, 그 허약함 때문에 나약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바람은 아무리 불어도 뭉쳐지지 않고, 비는 아무리 내려도 모양을 형성하지 않는다. 바람은 태풍이 되어 집과 배를 뒤집어 버리며, 비는 폭우가 되어 강물을 흘러넘치게 해 사람을 가둔다. 하지만 눈에는 잠재된 폭력성이 없다. 그 아름다운 차가움에 가혹함과 폭력을 떠올리는 건 인간의 인식이다.

기다리던 눈이 오지 않거나 아름답게 쌓인 눈이 녹아내린 아침에는 실망을 넘어서 낙담할 때가 있다. 작고 아름다운 결정체에 인간들의 마음이 이입되어 온갖 감정의 소모를 이루어 낸다. 문학이 추구하는 비유나 상징은 창조적이고 눈부신 것이지만, 설익은 생각을 아름답다는 이유로 ‘눈’에 뭉쳐서 표현하는 글들을 보면 안타깝다.
눈에 대한 찬미는 많지만 눈에 대한 ‘변명’은 많지 않다. 변명은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그 까닭을 말하는 행위라는 뜻뿐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려 사리를 밝힌다’는 뜻도 있다. 소비적인 표현과 죽은 비유에 동원되는 눈에게 변명이라도 하고 싶다. 그럴 때 바라보는 눈은 예쁘지 않고 갸륵하다. 눈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 필요 없는, 어쩌면 ‘완전한 변명’을 세 편의 시를 통해 살펴본다.

담백하고 순수한 눈

춥다. 눈사람이 되려면 얼마나 걸어야 할까? 잡념과 머리카락이 희어지도록 걷고 밤의 끝에서 또 얼마를 걸어야 될까? 너무 넓은 밤, 사람들은 밤보다 더 넓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이름을 붙여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름으로 말하고 이름으로 듣는 사람들
이름을 두세 개씩 갖고 이름에 매여 사는 사람들

깊은 산에 가고 싶다. 사람들은 산을 다 어디에 두고 다닐까? 혹은 산을 깎아 대체 무엇을 메웠을까? 생각을 돌리자, 눈발이 날린다.

눈꽃, 은방울꽃, 안개꽃, 메밀꽃, 배꽃, 찔레꽃, 박꽃

나는 하루를 하루 종일 돌았어도
분침 하나 약자의 침묵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들어가자, 추위 속으로.

때까치, 바람새, 까투리, 오소리, 너구리, 도토리, 다람쥐, 물
_ 신대철, <추운 산>

신대철(1945~) 시인은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1977)에서부터 최근 시집까지 의식의 치열함과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고자 하는 자기투쟁 의식을 개성적인 문체로 표현해 왔다. 시에서 문체를 언급하는 게 타당한지를 떠나 그가 보여준 산문시의 시행과 물음표의 활용 등은 서정적 세계의 치밀함을 표현하고 하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보인다. 첫 시집에 실린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 밤은 세 걸음 이상 / 물러나지 않는다(시 <박꽃> 일부)’는 시인의 치열함이 성취한 하나의 정점을 드러낸다. 박꽃이 피는 시간을 시인은 ‘세 걸음’이라는 공간으로 집약시킴으로써 어떤 인위도 끼어들 수 없는 자연을 그려낸다.

이 시의 화자는 깊은 산 속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눈사람이 되기 위해 더 깊은 산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름을 두세 개씩 갖고 이름에 매여 사는 사람들’을 뒤로 하며 ‘눈꽃, 은방울꽃, 안개꽃, 메밀꽃, 배꽃, 찔레꽃, 박꽃’을 찾아 나선다. 사람들은 이름에 얽매여 살지만 꽃들은 어떤 수식어도 없이 이름만 언급한다. 세속에서 온갖 소유욕과 명예욕에 찌들어 사는 인간들과 담백하게 고유의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연물과의 거리감은 멀기만 하다. 화자는 ‘하루 종일 돌았어도 / 분침 하나 약자의 침묵 하나 움직이지 못했’던 성찰을 바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하는 결연한 태도를 보인다. 깊은 산으로, 추위 속으로 들어가 눈사람이 되려고 하는 화자의 지향점은 순결성에 대한 굳세고 꿋꿋한 쏠림을 보여준다. 이 시에서 눈은 어떤 인위와 가식이 스며들지 못하는 순수의 상태이다.

폭력 권력을 상징하는 눈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_ 최승호, <대설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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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눈’은 산짐승과 굴뚝새를 고립시키고 얼어붙게 만드는 폭력과 차가움의 속성을 가진 존재로 표현된다. 최승호(1954~) 시인의 첫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는 사실적 관찰과 눈이 가지는 상투적 상징성을 벗어나면서도 생태주의 시인으로 불리는 시인의 관심사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새로운 군부독재 세력이 등장하여 강압적으로 통치했던 현대사의 어두운 현실로 눈은 대설주의보를 날리며 쏟아진다. 1983년에 발표된 이 시는 1980년대 군부정권을 배경으로 강압적인 독재 상황을 우의적으로 표현한다. 대설주의보가 환기하는 고립과 ‘눈보라의 군단’과 ‘백색의 계엄령’이 지시하는 군사 용어는 이 시를 군부 독재의 시대의 알레고리로 읽히게 하는 실마리다. 쪼그마한 굴뚝새가 몸을 서둘러 숨겨야 하는 눈보라는 국민을 폭압적 권력으로 억압하던 신군부를 상징한다. 명사로 시를 종결하면서 남기는 여운의 폭은 깊고 넓다. 눈의 속성이 정치적 상징성으로 읽히는 대표적인 시이다. 영화 <서울의 봄>의 장면이 겹쳐진다.

환상적이고 따뜻한 눈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_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Marc_Chagall,_I_and_the_Village_by Andrew Milligan sumo (CC-BY), wiktmedia.jpg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by Andrew Milligan sumo(CC-BY)


이 시는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으로 유명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 1887~1985)의 <나와 마을>이라는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왼쪽에 말의 두상을 배치하고 오른쪽에 초록 얼굴의 사내를 배치하는 등 여러 가지 모티프를 병렬적으로 제시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그림에서 김춘수(1922~2004) 시인은 ‘눈’의 자유로움을 가져온다. 그림은 상단부에 소년과 마을의 이미지를 구현하고 하단에는 눈이 내리는 풍경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한 화면에 담아낸다.
사물과 사물성을 바탕으로 한 존재론적 의미를 밝히려는 시인의 천착은 이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래의 시인들이 전통 서정시를 추구해 온 것과 달리 그의 시는 이른바 순수시 이론을 창작에서 구현하면서 동시에 여러 시론집을 통해 ‘무의미시’의 가능성을 깊게 탐구해왔다. 이 시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읽을 경우 이미지와 내용이 부딪혀 독해가 불가능하다.

무의미시는 시에 내용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기존 단어가 가진 관념을 벗어나 순수한 이미지만으로 작품을 창작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 작품에서도 시인은 다채로운 사물의 이미지들을 감각적인 언어로 재구성하며 시를 전개한다. ‘샤갈의 마을’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세계이며, ‘삼월’에 내리는 ‘눈’은 ‘사나이’의 ‘정맥’을 어루만지고 ‘날개’를 달고 내려와 마을을 덮으며 ‘겨울 열매들’을 ‘올리브 빛’으로 물들게 하고 ‘아낙들’에게 ‘불’을 지피게 한다.
구체적인 시의 내용을 통해 서정적 울림을 전하는 기존의 서정시와 다른 접근이다. 언어가 갖고 있는 순수한 이미지를 표착(漂着)하려는 것이다. 봄의 생명력을 다채로운 ‘눈’의 이미지와 연결시켜 환상적인 분위기와 따뜻한 생동감을 표현한다.

눈이 온다. 눈이 내린다. 눈이 오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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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형석, 사진 | 김수길
[문학산책] <추운 산> <대설주의보>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