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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in가요] 최초의 대중가요 <사의 찬미>

모던보이와 신여성의 아지트, 일제강점기 다방 풍경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인 윤심덕의 <死의 讚美>가 발표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의 일이다.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원제 Donauwellen Walzer)’에 가사를 붙인 이 곡은 우리말로 녹음된 최초의 서양식 노래일 뿐만 아니라 유성기(留聲機) 구매를 촉발시켜 식민지 조선에 본격적인 음반산업을 태동하게 한 전대미문의 히트곡이었다.

삶에 대한 짙은 허무와 원망이 절절히 배인 이 노래가 발표되기 직전 노래를 부른 윤심덕이 연인이자 극작가인 김우진과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유작(遺作)이 된 <사의 찬미>는 음반 한 면에 노래 한곡이 수록된 ‘쪽판(싱글앨범)’임에도 불구하고 초판 500장이 며칠 만에 매진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신여성의 패션 아이콘으로 신문, 잡지를 장식했던 전성기의 윤심덕

처자식까지 있는 유부남과의 스캔들이었던 데다 한때 경성(京城)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그녀의 유명세를 감안해도 기대치를 웃도는 반응이었다. 음반이 품귀현상을 보이자 뒷면에 찬송가 ‘부활의 기쁨’이 추가된 정식 앨범이 재발매되었고, 한 달 사이에 생전에 그녀가 녹음해 둔 24곡의 노래를 담은 12장의 앨범이 쏟아져 나올 만큼 <사의 찬미>가 일으킨 사회적 신드롬은 대단했다.

희대의 스캔들, ‘동반자살’이 남긴 유작

대중가요 최초의 히트곡을 남기고 서른 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윤심덕은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에노음악학교(上野音樂學院)에 입학한 당대의 인텔리 여성이었다. 쾌활한 성격에 서구적인 용모로 일본 유학시절부터 조선 남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귀국 후에도 세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연애편력으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녀에게는 내로라하는 예술인과 부호들의 구애가 줄을 이었고 이들과의 화려한 연애담은 이따금 <新女性> 같은 여성잡지에 기사화될 정도로 호사가들의 관심사였다.

당시 윤심덕에게는 김우진 외에도 집안의 소개로 만난 김홍기라는 공인된 애인이 있었다. 자유연애를 염원하던 당시 여성들의 소리 없는 응원에 힘입어 이런 기묘한 삼각관계는 신여성의 특권 정도로 용인되었지만, 을지로 일대의 땅부자이자 친일파 호색한으로 유명한 이용문과의 추문은 그녀의 화려한 이력에 종지부를 찍는 섹스스캔들로 번졌다. “일본까지 갔다 온 여자가 돈 때문에 친일파 부자의 첩이 됐다”는 세간의 손가락질을 견디다 못한 그녀는 한동안 만주로 몸을 피했다가 비난 여론이 잦아든 뒤에야 국내로 돌아왔다.

실의에 빠진 윤심덕에게 신극단체인 ‘토월회’에 들어가 배우활동을 권유한 이가 그녀를 믿고 기다려준 김우진이었다. 하지만 한때 조선 음악계의 프리마돈나로 주목받던 윤심덕에게 변변찮은 배우 활동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유교적 가치관이 엄존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한번 주홍글씨가 새겨진 여성에게 사회적 재기의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더욱이 목포의 명망가인 김우진의 집안에서 자신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던 윤심덕에게 식민지 조선의 경직된 공기는 어쩌면 그때부터 자신의 숨을 죄어오는 공포였을 것이다. 어쨌든 조선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이 희대의 스캔들 덕분에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대중가요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초판 품절 이후 정식음반으로 재발매될 당시의 음반 속지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 너 찾는 것 설움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 너 찾는 것 설움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 너 죽은 후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 너 찾는 것 설움

유성기 보급과 함께 열린 대중가요 전성기

1913년 매일신보에 실린 광고에 따르면 당시 음반(유성기용 SP판) 1장의 기격은 2원, 이를 재생하는 유성기 값은 20원이었다. 일반인들의 평균 급료가 20원 미만이었고, 선망 받는 직업인 교사 급여도 50원이 안되던 시절이라 <사의 찬미>가 발표되던 무렵 유성기를 보유한 가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당시 유성기는 판소리, 잡가, 민요 등 주로 국악 음반을 듣는 데 사용되었고 일부 상류층에서나 일본 가요나 클래식 음반을 보유한 정도였다.

하지만 <사의 찬미>가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킨 1920년대 후반부터는 유성기의 확산과 함께 일본의 엔카를 우리 고유의 3박자로 편곡한 ‘트로트’가 대중적인 장르로 정착되었다. <오빠는 풍각쟁이>, <이 풍진 세상에>, <황성옛터> 등이 초창기 트로트의 인기를 견인했던 대중가요들이다.

또한 이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전통 민요를 서양 악기의 반주에 맞춰 부른 ‘신민요’ 역시 인기 있는 장르였다. 신민요는 전문교육을 받은 가수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권번(券番, 일제가 만든 일종의 기생조합) 출신의 기생들이 녹음할 수 노래인 데다 대부분 현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능숙한 기량을 가진 덕분에 해방 이후까지도 크게 성행했다.

당시의 대표적인 신민요 가수로는 선우일선, 박부용, 이은파, 이화자 등의 권번 출신 가수들을 비롯해 평양 출신의 인텔리 여성인 왕수복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선우일선과 함께 신민요의 양대산맥으로 불린 왕수복은 1935년 처음 실시된 조선 인기가수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유성기의 보급이 불러온 변화는 무엇보다도 가수(歌手)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음반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한 빅터레코드와 콜럼비아레코드 등 산업자본의 진출은 필연적으로 우리말로 노래를 부를 가수를 필요로 했다. 레코드사가 주관하는 가수선발대회가 열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며, 부와 인기가 따르는 가수라는 직업은 1930년대에 이미 대중들이 우러러보는 특별한 존재로 대접 받았다.

여담이지만 당시 선발된 여가수들 중에는 유독 이북 출신이 많았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남부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사회활동에 관대한 이북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 덕분이었다. 가수들은 해당 레코드사에 소속되어 일정한 월급을 받고 노래를 취입했고, 공연이 있을 때는 별도의 출연료가 지급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또한 음반 판매량이 많거나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가수들은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특정 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들에게 노래를 만들어주는 작곡가나 작사가 역시 레코드사에 소속되어 월급 외에도 곡을 만들 때마다 약간의 수당을 지급받았다.

신곡을 취입할 때 가수들에 대한 레코드사의 급여 역시 개인의 지명도나 음반 판매량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다. 신민요를 부르는 권번 출신 기생들은 10∼70원, 일반 가요를 부르는 가수들은 20∼100원, 연극이나 영화를 통해 얼굴이 알려진 배우는 통상 30∼120원의 급여를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이 당시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린 것은 기생출신의 가수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여배우 출신으로 <황성옛터>를 히트시킨 이애리수의 전성기 시절 수입이 월 300원 정도였던 반면 신민요 가수인 왕수복은 월평균 800원이 넘는 수입을 올렸다. 그 이유는 신민요 가수들의 본업이 대부분 기생이었기 때문에 속칭 ‘행사’에 출연하는 횟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신민요 가수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왕수복

문화공간, 다방의 확산

대중가요가 일반화된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기생이나 배우출신의 가수들에 비해 오디션을 통해 발굴된 직업가수들이 점차 가요계의 주류로 대접받게 된다. 가요를 듣는 대중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가창력이 가수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직업가수들의 인기가 높아진 것은 그 즈음 일반에 확산되기 시작한 ‘다방 문화’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 공간에서 커피와 음악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은 1923년 충무로3가에 문을 연 ‘후다미’와 충무로 2가의 ‘금강산’으로 초기에는 주로 일본인을 위한 사교클럽처럼 운영되었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다방은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이 종로구 관철동에 개업한 ‘카카듀’가 시초였고 1929년 종로2가에 영화배우 김인규와 화가 심영이 동업으로 문을 연 ‘멕시코’가 뒤를 이었다.

이밖에도 1930년 소공동에 문을 연 ‘낙랑파라’를 비롯해 엘리자, 다이나, 프린스, 백룡, 성림, 본아미, 파르콘, 돌체 등 많은 수의 다방들이 생겨났다. 이 당시만 해도 다방 주인들은 대부분 예술인들이 많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경성의 인텔리와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레코드 콜렉션이 풍부한’ 다방일수록 많은 이들이 일삼아 들리는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신문물의 하나인 다방 풍경을 소개한 당시 신문기사는 ‘이곳에는 축음기에서 쟈즈(재즈)를 비롯한 서구의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이 흘러나오고 가베(커피)와 카루삐스(칼피스) 같은 음료를 맛볼 수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쓰인 ‘쟈즈’라는 용어는 당시 조선에서 ‘서양의 음악을 통칭하는 말’로 오늘날의 재즈(Jazz)와는 차이가 있다. 쟈즈와 함께 이 곳에서 즐겨 들을 수 있는 것이 우리말로 부른 유행가, 즉 대중가요들이었다.

커피 한 잔의 가격은 10~15전으로 당시의 소득 수준에 비해서는 꽤 부담스러운 액수였다. 그렇다보니 다방을 들락거리며 물만 마시는 이를 가리켜 ‘금붕어’,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온종일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이를 ‘벽(壁)’이라고 비웃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다방 문화는 생활 속에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그동안 일본놈들을 죄다 속여 먹었다”

이 시기의 다방과 관련해서는 소설가 이상 역시 재미있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1933년 종로에서 다방을 열었다가 두 번이나 장사가 안 돼 폐업했던 이상은 얼마 뒤 세 번째로 다방을 개업하면서 상호를 ‘69’로 지었다. 당초 별 생각 없이 영업을 허가해주었던 종로경찰서는 시민들의 제보가 잇따르자 그제서야 이 상호가 음란한 성 체위를 뜻한다는 것을 알고 부랴부랴 영업허가 취소처분을 내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상이 보인 반응이다. 그는 화를 내거나 항의하는 대신 “그동안 일본놈들을 죄다 속여 먹었다”며 껄껄 웃고 말았다고 한다. 극작가로 유명한 유치진도 당시 소공동에 ‘프라타나’라는 다방을 운영했으며 오리온, 허리우드, 미모사, 라일락 등의 다방도 시민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 명소였다.

이처럼 당시 인구 30만 명에 불과한 경성에 우후죽순처럼 다방이 들어서면서 이곳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향유하게 된 대중가요는 서민들에게 보다 친숙한 대중문화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1939년 발표된 이난영의 ‘다방의 푸른 꿈’은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모던보이’와 ‘신여성’들이 예술과 사랑을 논하던 그 옛날 서울 거리의 어느 다방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조용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부르누나 부르누나 / 흘러간 꿈을 찾을 길 없어

연기를 따라 헤매는 마음 / 사랑은 가고 추억은 남아

블루스에 나는 운다 /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