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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in가요] 블루스를 사랑한 언더그라운더

신촌블루스의 리더, 엄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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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말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양분하고 있던 주류 음악시장에 ‘포크(통기타)’ 가수들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국내 대중음악계에도 서서히 지각 변동이 시작된다. 일명 ‘젊은이들의 음악’이라 불리던 포크 음악은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조영남, 서유석, 홍민, 김도향 등의 스타를 배출하며 70년대 초반부터 대학가나 다운타운을 넘어 TV, 라디오의 쇼프로그램과 공연시장에서 일정한 지분을 확보해 나갔다. 달달한 외국 팝송을 번안해 통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는 이들의 노래는 젊은이들의 애창곡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상업적 파급력은 이보다 덜했지만 김민기, 한대수, 양희은, 이필원의 자작곡 역시 기존 음악시장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시도를 통해 기대를 한 몸에 모았고 여기에 어니언스, 김정호, 이정선, 양병집 등 새 얼굴들의 활약까지 더해지며 포크 음악은 70년대 중후반까지 가파른 전성기를 구가한다.

당시 포크 음악의 중심지는 단연 젊은이들의 성지인 명동이나 종로 일대였다. 인기DJ 이종환이 운영하던 ‘쉘브르’가 종로2가에 있었고 60년대 중반부터 동양방송 PD로 활동하며 수많은 통기타 가수들을 발굴한 이백천 역시 무교동에 ‘쎄시봉’이란 음악감상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척인 명동에도 ‘내쉬빌’과 ‘지중해’, ‘예스’를 비롯해 십여 개의 대형 음악감상실이 성업 중이었다.

서울 ‘신촌파’의 중심인물이었던 엄인호

시내 중심가의 음악감상실은 음악을 감상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신인 가수들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특히 약 4백석 규모의 쎄시봉은 하루 천여 명의 손님들이 드나들 정도로 인기가 좋았는데 이곳 무대에서 통기타 반주로 번안 팝송을 부르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도향은 그 후 가요계에 정식 데뷔해 청춘스타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가수지망생들과 손님들로 늘 시끌벅적하던 이종환의 쉘브르 역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장안의 명소로 유명세를 떨쳤다.

음악감상실의 고객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교수, 문인, 예술인 등 문화예술에 관심이 높은 이른바 지식층들이 많았다. 사회 전반에 유신독재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던 당시, 갈 곳 없는 지식인들이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기에는 음악감상실만한 곳이 따로 없었다. 또한 제법 알려진 음악감상실은 영향력 있는 방송관계자들이 아지트 삼아 자주 이용했기 때문에 오디션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가수지망생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메이저 무대에서 약간 비켜난 서울의 부도심, 신촌 일대에도 언제부터인가 일군의 젊은이들이 모여 젊음의 헛헛함과 음악에 대한 갈증을 달래던 작은 음악감상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 일대의 메이저 음악감상실에 비하면 확실히 이곳은 규모나 정서면에서 마이너한 면이 많았다. 대부분 테이블 대여섯 개 정도의 작은 규모인데다 사실 이곳은 음악감상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카페나 간이주점에 가까운 형태로 운영되는 곳이 많았다. 음악 역시 소녀취향이 아니라 마니아들이나 듣기 좋아할 메시지 지향적인 팝들을 주로 선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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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오엑스(OX)', '츄바스코’, ‘하렘’ 등 몇몇 음악감상실에서는 가난한 지역 예술가들이나 예술가 지망생들이 매일 같이 찾아와 술을 마시거나 끼리끼리 어울려 즉흥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밤늦도록 술과 음악이 이어지는 이곳은 당시로써는 일종의 문화 해방구였으며, 시대와의 불화로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청춘들이 모이던 불온한 장소였다.

거의 매일 이곳을 찾는 술손님 중에는 음악에 뜻을 두고 있던 무명의 음악인들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로써야 매일 밤 하릴 없이 연세대, 이대 앞의 주점을 배회하는 술꾼들이자 인생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룸펜들이었지만, 이들 중에는 실제로 훗날 가요계에 데뷔해 굵직한 족적을 남기게 되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훗날 일명 ‘신촌파’라고 불리게 되는 이들의 면면은 지금 보아도 제법 화려한 데가 있다. 데뷔 전 김현식이 처음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곳이 이곳이었고 전인권과 허성욱 역시 들국화로 데뷔하기 전 이곳 신촌 일대의 음악감상실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신촌파를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한국 블루스밴드의 선구자인 ‘신촌블루스’의 기타리스트 엄인호(63)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독학으로 기타연주 마스터

지금은 기억하는 이들조차 많지 않지만, 신촌블루스는 80년대 들어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주류 무대로 올려놓은 비주류의 기수였으며, 숱한 뮤지션과 협업하며 우리 가요사에 나름대로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전설적인 밴드였다.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답게 그룹 활동에 매이지 않고 이합집산을 거듭했던 이 밴드가 지금도 오롯이 ‘신촌블루스’라는 이름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밴드를 이끌어온 리더 엄인호의 공로라 할 수 있다.

엄인호는 1952년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였던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본으로 음악 유학을 다녀오고 해방 후 미군부대에서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했던 엘리트 음악인이었는데, 그 영향 탓인지 엄인호의 둘째 형은 고교 졸업 후 미8군 무대에서 드러머로 활동했고, 셋째형 역시 일반 무대에서 색소폰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서울 창신동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을 보낸 엄인호는 동네친구들로부터 ‘샌님’이란 별명으로 불릴 만큼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였지만 음악적 재능은 매우 특출했다.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음악 프로그램에 학교 대표로 참가해 입상을 한 적도 있고, 서울 시내의 어린이 찬송대회를 휩쓸 만큼 어려서부터 엄인호는 뛰어난 가창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 양친이 모두 돌아가신 후 사춘기 때부터 친척집에 얹혀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성격은 점차 염세적으로 변해갔다.

당시 그가 유일하게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음악뿐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소울과 CCR, 사이키델릭한 록음악에 깊이 빠져 들었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아마추어 밴드를 조직해 음악에 대한 갈증을 달래던 엄인호는 가족들이 음악에 깊이 빠진 자신을 나무라자 졸업 후 곧 집을 나와 파주, 왜관의 미군클럽을 전전하며 연주를 계속했고, 이마저 싫증나면 부산이나 진주의 음악다방에서 DJ로 일하며 히피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어디에도 구속되기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지방을 전전하는 동안 그는 당시 많은 예술인들이 그러했듯 대마초에도 손을 댔고 거의 매일 술에 잔뜩 취해 잠들었다가 정오가 지나서야 눈을 뜨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였다. 트레이드마크가 된 장발머리 역시 그때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밥 딜런, 존 바에즈 등 사회성 짙은 포크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기성세대의 관습이나 체제는 무언가 그에게 맞지 않았다. 더욱이 군사독재 정권의 문화예술 정책은 가뜩이나 예민한 성격의 엄인호에게 더욱 견딜 수 없는 현실이었다.

가만히 한 군데에 안주하지 못하고 대전, 부산, 진주, 울산 등 여러 곳을 정처 없이 떠돌며 지내던 그는 이따금 서울 신촌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엄인호는 이곳에서 훗날 자신과 음악적 동지가 된 여러 인물들과 차례로 교분을 맺게 된다. 당시 오엑스를 운영하고 있던 양병집을 비롯해 김영배, 김현식, 이정선, 박동률, 이응수, 라원주 등이 당시 엄인호와 자주 어울리던 멤버들이었다. 1979년 엄인호는 그곳에서 만난 이광조, 이정선과 함께 ‘풍선’이란 이름의 트리오 데뷔앨범을 발매했지만 가수 활동을 계속 이어가지는 않았다.

1986년 ‘신촌블루스’ 이름으로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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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블루스 1집 앨범

그 후 1년 6개월 동안 방위병으로 복무하는 동안에도 엄인호는 평소 자주 어울리던 박동률, 라원주, 양영수 등 신촌파의 실력 있는 이들과 뭉쳐 ‘장끼들’이란 일종의 슈퍼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 음악적 완성도나 대중적 인기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장끼들은 이후 3년 정도 밤무대 활동을 계속하다 해체되었고 엄인호는 뉴 웨이브 음악에 기반을 둔 비공식 솔로음반 ‘환상/골목길’을 발표하며 대중들에게 조금씩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신촌 블루스라는 이름이 대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1986년 4월이었다. 이때 엄인호는 신촌에서 함께 어울리던 이정선, 이광조, 한영애와 함께 신촌에 있던 ‘레드 제플린’이란 카페에서 매주 토요일 정기공연을 벌였는데 당시 이 밴드가 사용했던 이름이 바로 ‘신촌블루스’였다. 주로 포크 록을 연주하던 엄인호는 이때부터 블루스에 깊이 빠져 들어 잼 형태의 공연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신촌블루스의 인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카페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두 달 후 동숭동 파랑새소극장을 빌어 열린 첫 외부공연은 소극장공연 사상 최다 관객이 들만큼 대성공을 거둬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른바 ‘주류 무대’라 불리던 방송 출연 대신 당시로써는 드물게도 라이브 공연으로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인 신촌블루스는 이때부터 그룹 들국화와 함께 ‘언더그라운드의 상징’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신촌블루스의 음악적 지향점은 정통 블루스를 기반으로 레게, 펑키, 재즈 등을 접목한 한국적 블루스의 창조였다. 엄인호를 비롯해 언더그라운드에서 탄탄한 실력을 다진 신촌블루스는 데뷔 후에도 멤버들 간의 자유로운 조인트 형식을 유지했고, 이런 색다른 시도는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정서용 등이 보컬로 참여한 2집 앨범에 대한 반응 역시 폭발적이었다. 신촌블루스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무명 가수들 역시 이들처럼 대학가를 통해 데뷔하거나 소극장 중심의 라이브 무대를 통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에도 비로소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이 공공연히 쓰이게 되었다. 그때그때 멤버들은 바뀌었지만 리더인 엄인호의 존재로 인해 신촌블루스는 매 음반마다 고유한 자신들의 음악적 색깔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정통 블루스 뮤지션이었던 엄인호는 매 앨범마다 한국적인 블루스 기타가 표현할 수 있는 궁극의 영역을 보여주며 신촌블루스가 들국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국내 가요계에 자리매김하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90년 김현식이 사망하고 이정선, 한영애 등의 기존 멤버들이 솔로로 독립해 나간 후에도 엄인호는 ‘신촌블루스’를 재정비해 활동을 계속해나갔다. 3집 앨범 멤버로 팀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던 정경화, 이은미가 떠난 뒤 엄인호는 94년 신촌블루스 4집 활동 때까지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크고 작은 언더그라운드 무대에서 라이브 활동을 고수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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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력 짙은 보컬과 블루스를 모태로 한 다양한 음악적 실험이야 말로 엄인호가 우리 음악사에 깊게 남겨 놓은 족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곡 ‘골목길’을 비롯해 ‘이별의 종착역’, ‘나그네의 옛 이야기’, ‘비오는 어느 저녁’ 등 다수의 히트곡을 보유한 그는 지난해 신촌블루스를 재결성한 뒤 환갑이 넘은 지금도 간간히 무대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