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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시네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연인>

베트남의 서글픈 역사와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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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인> 스틸 컷

소녀는 가족들과 함께 여름 방학을 보내고 학교가 있는 사이공으로 돌아가기 위해 혼자서 메콩강을 건너는 낡은 여객선에 승선한 참이다. 식민지인 베트남에 정착해 살고 있지만, 백인이면서도 지배계층에 속하지 못한 가난한 프랑스 가정의 외동딸은 그러면서도 백인으로서의 우월감을 버릴 수 없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식민지 생활에서 그녀가 내세울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절망과 무기력에 빠져있는 어머니,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한 이기적인 오빠, 매사 심약하기만 한 남동생을 사실 그녀는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의심하는 그녀의 가족들은 그저 메콩강의 흙탕물처럼 한 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이곳 생활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는 중이다.

한편 허름한 비단 드레스에 무용 구두를 신고 남자용 모자를 눌러쓴 채 갑판에서서 물끄러미 메콩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소녀를 흥미롭게 주시하는 시선이 있다. 호화로운 검정 리무진 안에 앉아 있는 젊은 중국인 남자다. 이제 막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인 남자는 이윽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천천히 차에서 내려 소녀에게 다가간다. “혹시 담배 피우세요?”

열 다섯 살 소녀에게 담배 케이스를 열어 보이는 서른두 살 남자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소녀는 말이 없다. 남자는 고작 그런 상투적인 말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심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소녀가 말을 건넨다. “누구세요?”

남자의 호의로 리무진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사이공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소녀는 실수인 척 손을 밀착해 오는 남자의 저의를 헤아려 본다. 젊고 싱싱한 백인 소녀의 육체를 탐하는 돈 많은 중국 남자의 손에 가만히 몸을 맡긴 채 어쩌면 소녀는 시작하지 말아야 할 불온한 사랑 앞에서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는 자신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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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인> 스틸 컷

1920년대 식민지 시대의 베트남, 아픈 사랑의 시작

목요일마다 남자는 소녀를 데리러 리무진을 타고 학교 기숙사로 찾아온다. 어느 날, 시장통에 있는 남자 소유의 외딴방에서 둘은 드디어 알몸이 되어 사랑을 나눈다. 나이 어린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중국 남자에게 소녀는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똑같이 대해 달라”고 당돌하게 말한다.

소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백인인 자신이 무슨 이유로 이 중국 남자를 사랑하겠느냐고, 그저 남자가 가진 돈에 이끌릴 뿐이라며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시킨다. 이기적이기만 한 가족들에게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창녀처럼’ 몸을 허락하는 것뿐이라고 믿는다. 낯선 중국 남자와의 섹스는 그녀에게 단지 자기혐오와 도피욕이 낳은 욕망의 행위다.

아버지가 정해준 약혼녀가 있는 남자는 반대로 자신이 진심으로 소녀를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움이 앞선다. 메콩강 위의 여객선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소녀에게 깊이 빠져들고 있는 남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프랑스 여자와의 결혼을 강행할 자신이 없다. 소녀와의 사랑이 두려운 남자는 그래서 한사코 돈 때문이라고, 그저 자신의 두툼한 지갑을 탐내는 여자일 뿐이라고 믿고 싶다.

“나는 너와 결혼할 수가 없어. 나는 중국인이잖아.”
“그거 다행이네요. 나도 중국인은 별로 안 좋아해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제 조금씩 서로에 대한 진심을 느낄 수가 있다.
소녀의 집에서는 상대가 중국 사람이라는 걸 알고 둘의 만남을 조롱하며 극구 반대하지만 그가 엄청난 재력가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내 잠잠해진다. 남자의 집안 분위기는 더욱 무겁다. 이미 중국인 여자와 약혼까지 한 아들의 불장난에 격분한 아버지는 어린 프랑스 창녀와 결혼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재산을 물려주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남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혼자와 혼례를 치르기로 결심한다. 1년 반 동안 몰래 사랑을 나누던 시장통 한켠의 외딴방에서 남자는 아편을 피우며 이렇게 말한다.
“난 너를 향한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어. 내겐 이제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아편에 취해 몽롱해진 남자에게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담아 간절히 부탁한다.
“결혼하고 나서도 꼭 한번만 이곳으로 나를 만나러 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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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연인> 국내 개봉 당시 광고 포스터

스무살 여주인공 제인 마치의 ‘전라 노출’로 화제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 있던 1920년대의 베트남을 무대로 프랑스인 소녀와 중국인 남자의 강렬하고 가슴 아픈 사랑을 그린 <연인(원제 L’amant)>은 지금도 많은 영화팬들이 기억하는 세기의 멜로 영화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그리뜨 뒤라스가 젊은 시절 중국인 남자와의 첫사랑을 기록한 자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베어(Bear)>로 흥행감각을 입증한 장 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 감독이 4년 여 동안 공을 들인 차기작으로 큰 기대를 불러 모았던 작품이다.

하지만 정작 <연인>의 개봉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각본까지 참여했던 원작자 뒤라스가 촬영 중 감독과의 불화로 촬영장을 떠나면서 급기야 “이 따위 ‘연인’은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는 독특한 구조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묘사로 전세계 35개국에서 번역 출간된 이 작품은 작가의 우려대로 영화로 완성된 후 작품성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움베르토 에코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1988년작 <장미의 이름(The Name of Rose)>에서도 지적됐던 것처럼 장 자크 아노는 단순한 이야기를 아기자기한 화면으로 밀도 있게 구성하는 능력은 있지만 난해하고 복잡한 주제 앞에서는 심층에 다가서지 못하고 주변부를 서성거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아쉬움은 ‘연인’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1992년 국내 개봉 당시 언론의 관심도 여주인공 제인 마치(잔느 모로 역)의 노출 연기에만 집중되었다. 일부 장면에 모자이크 처리를 해 개봉되었지만 갓 스무 살에 접어든 어린 여배우의 음모 노출은 그 당시 한국 사회에 격렬한 ‘외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금단의 사랑에 갈등하는 양가휘의 절제된 연기 따위는 아예 정당한 평가의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였지만 이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워낙 뜨거워 당시 청소년들 중에도 어른들의 눈을 피해 몰래 <연인>을 관람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에서 커피재배 시작

이 영화의 배경이 된 베트남은 1883년 프랑스와 체결한 아르망 조약(Treaty of Harmand)에 따라  1887년부터 라오스, 크메르와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Indochina) 식민지’가 되었던 불행한 역사를 갖고 있다.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은 비옥한 자연환경을 이용한 쌀, 후추, 새우, 커피 등으로 특히 커피는 연간 약 120만 톤을 생산해 이 가운데 95%를 해외로 수출할 만큼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품목이다.

베트남에 처음 커피나무를 들여온 것은 1857년 프랑스에서 건너온 가톨릭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이 갖고 온 것은 인근 인도네시아 자바섬이나 레위니옹에서 재배하던 아라비카 커피묘목으로 기록에 의하면 1865년부터 1876년 사이에 중북부 통킹 지방을 중심으로 약 40만 그루의 커피나무가 재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베트남은 1963년부터 북부지역에 아라비카 커피를 약 1천ha 정도 재배했지만 병충해로 인해 수확에 실패했다. 이어 남부 달랏(Dalat)과 동나이(Dong Nai)의 8천 ha에 로부스타, 람동(Lam Dong)의 1,700ha에 아라비카를 시험재배했지만 전체 생산량은 해마다 5천 톤을 넘지 못했다.

베트남의 커피산업이 지금처럼 국가적인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베트남전의 총성이 완전히 멎은 1970년대 중반부터다. 전후 복구사업에 나선 베트남은 정부 주도로 커피 생산을 국가 경제의 최우선 산업으로 선정하고 중앙의 고산지대에 거대한 로부스타 농장 개간사업을 시작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으로 짧은 기간 안에 안정화되기 시작한 베트남 커피 산업은 커피나무 재배에 적합한 고지대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려 현재는 중부 고원지대 반메투옷(Ban Me Thuot) 등 전 국토에 걸쳐 안정적인 생산지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 커피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반메투옷은 커피 재배에 적합한 현무암 토양으로 이뤄져 커피 생산의 최적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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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베트남은 세계 최대의 로부스타 커피 수출국으로 커피 농장에서 생산된 커피들은 대량 포장되어 전세계로 수출된다.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베트남 정부의 주도로 최근 들어 아라비카 원두의 생산량을 늘리는 방안이 모색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별다른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인스턴트 커피 소비량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도 10년 넘게 최다 커피 수입국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이 가운데 대부분이 로부스타종이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한해 커피 수입량의 60%가 베트남산 커피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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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연유 커피, 카페 쓰어 농(Caphe sua nong)

아프리카나 중남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커피는 이미 일상적인 음료로 자리 잡고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보통 양철이나 알루미늄 필터를 잔 위에 걸쳐놓고 커피를 걸러 마시는데 우유 대신 부드러운 연유를 넣어 뜨겁게 마시는 ‘카페 쓰어 농(Caphe sua nong)’이나 얼음을 넣어 차게 식힌 ‘카페 쓰어 다(Caphe sua da)’를 즐겨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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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 드립으로 내린 연유 커피

가슴 속에 슬픈 사랑을 묻어둔 연인, 연인들

다시 영화 <연인>으로 돌아가 보자. 결혼 이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다 지친 소녀는 결국 인사도 없이 프랑스행 귀국선에 몸을 싣는다. 사이공 항구를 떠나는 배 위에서 그녀는 부둣가 한 귀퉁이에 세워진 남자의 승용차를 발견하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차마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던 남자는 그렇게 숨어서라도 소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배 위에서 소녀는 자신이 그 중국인 남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깨닫고 참았던 눈물을 떨군다.

수십 년이 지나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버린 소녀는 이제 파리 시내의 어느 다락방에서 마음  속에 감춰두었던 그와의 사랑 이야기를 담담하게 글로 써내려 간다. 그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중국식 억양의 떨리는 목소리를 가진 그 남자다. 남자는 그제서야 수십 년간 고이 담아두었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지금껏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죽는 날까지 사랑하겠노라고….

창밖에는 세찬 눈발이 무심하게 쏟아지고 있다.

글 | 김정현(카페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