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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기행] 프라페 Frappe

흔들었더니 냉커피의 시작

[음료기행] 프라페 Frap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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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페(Frappe)’는 일반적으로 얼음과 재료를 믹서에 간 음료를 일컫지만 그리스에서는 커피음료로 통합니다. 그리스를 방문한 여행객이라면 쉽게 접할 수 있지요. 인스턴트커피, 우유, 설탕, 얼음을 믹서 또는 블렌더로 갈아서 만듭니다. 그리스식 냉커피인 셈이죠. 
프라페는 ‘얼음으로 차게 식히다’라는 뜻의 프랑스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때문에 프라페를 프랑스 전통음료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프라페와 비슷한 음료로 그라니타(Granita), 셔벗(Sherbet), 스무디(Smoothie), 슬러시(Slush) 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음료는 얼음을 사용하지 않고 재료들을 갈아낸 즙을 살짝 얼리거나 냉동과일을 이용해 만듭니다. 

새로운 음료의 탄생

프라페는 우연한 기회에 발명되었습니다. 1957년 9월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열린 국제무역박람회에서죠. 네슬레의 그리스 대리점인 ‘Andreas Dritsas’에서 영업을 총괄하던 디미트리오스 바콘디오스(Dimitrios Vakondios)가 이 박람회 기간 동안 발명했습니다. 그 발명의 순간을 재구성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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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페를 발명한 바콘디오스(Vakondios)

그는 네슬레가 어린이용 초코음료로 개발한 ‘네스퀵’이라는 제품을 열심히 홍보하고 있었을 겁니다. 쉐이커에 초코분말과 물을 넣고 잘 흔들어 부스를 방문한 관람객들에게 나눠줬겠지요. 9월이었지만 여전히 여름이어서 그는 갈증을 느낍니다. 뭔가 시원한 것이 마시고 싶었죠. 그때 그의 눈에 띈 것이 쉐이커와 인스턴트커피였습니다. 그는 무심코 쉐이커에 찬물과 인스턴트커피를 넣고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얼마쯤 흔들었을까. 쉐이커 뚜껑을 열자 한껏 부푼 거품이 분출하며 그의 셔츠에 얼룩을 남깁니다. 그리스의 국민음료인 프라페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미세한 거품이 그득했고, 맛은 부드러웠습니다. 무엇보다 청량감이 갈증을 풀어주었습니다. 
네슬레는 이 발명의 순간을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자사의 인스턴트커피로 훌륭한 청량음료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죠. 1960년대 초반의 광고 문구는 이렇습니다. “당신이 할 일은 그저 네스카페, 설탕, 찬물을 넣고 세차게 흔들어 섞는 것뿐입니다(All you have to do is beat Nescafe, sugar, and cold water).”

그리스 테살로니키,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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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테살로니키

프라페의 탄생 이야기는 테살로니키의 역사와 오버랩됩니다. 테살로니키는 기원전 7세기에서 2세기까지 번영했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기원전 315년 카산드로스가 왕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항구도시이죠.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168년 로마에 의해 멸망했고, 이후 테살로니키는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상업중심지로 발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도시의 교회에 보낸 두 통의 편지는 기독교 신약성서에 <데살로니가전서, 후서>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마케도니아 하면 알렉산드로스 왕이 떠오릅니다. 20세에 왕위를 물려받은 알렉산드로스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페르시아 제국은 물론 인도 인더스강까지 제국을 건설했지요. 정복지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어요. 지금까지 남아있는 게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죠. 
이 도시에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두 개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무세이온(Mouseion)과 대도서관입니다. 무세이온은 뮤지엄(Museum)의 어원으로서 문화와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이후의 왕인 프톨레마이오스1세가 아테네의 무세이온을 본떠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구의 둘레를 측정한 에라토스테네스, 처음으로 태양중심설을 주장한 아리스타르코스, 평면기하학을 완성한 에우클레이데스, 비중의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 등의 과학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죠. 
대도서관은 프톨레마이오스2세 때 완공되었고, 무려 50만 권이 넘는 장서가 보관되었다고 합니다. 이 도서관은 로마가 이집트를 정복한 기원전 30년까지 세계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2천 여년이 지난 2002년에 그 자리에 새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으로 태동한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헬레니즘 문명은 고대 그리스와 중동, 서남아시아의 문화가 융합된 것입니다. 헬레니즘이라는 말은 역사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이 1863년 발간한 그의 책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역사>에서 처음 사용했습니다. 그는 고전 그리스문화에 심취해있던 알렉산드로스가 정복지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했고, 이것이 그곳의 문화와 결합되어 독특한 문명으로 발전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문명이 섞여 새로운 것을 낳기도 하지만 전쟁을 수반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헬레니즘 문명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정복전쟁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를 통한 문명은 어떤 명분과 의미를 붙이더라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평화적인 교류와 협력을 통해 문화가 융합되고 새로운 문명을 잉태했을 때,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다고 믿습니다. 

평화로운 섞임, 냉음료의 대명사로 정착

그런 측면에서 프라페의 탄생은 평화롭습니다. 이걸 마시라고 강요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찬물에 ‘그저 섞었을 뿐’인 프라페는 그리스뿐 아니라 세계로 퍼지며 냉음료의 대명사로 자리 잡습니다. 인스턴트커피 대신 에스프레소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넣어 만들기도 하는데, 이를 특별히 ‘커피 프라페’라 부릅니다. 
스타벅스는 프라페와 카푸치노를 결합해 ‘프라푸치노’라는 음료를 개발하기도 했지요. 다른 카페 프랜차이즈업체들도 프라페를 베이스로 한 음료 메뉴를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습니다. 커피 대신 녹차, 체리, 피스타치오, 민트 등과 얼음을 갈아 내놓기도 합니다. 메뉴 이름은 저마다 다르지만 재료와 얼음을 넣고 블렌더로 간 것이라는 점은 같습니다. 


칵테일 메뉴에서도 프라페는 이름을 올립니다. ‘카시스 프라페’가 그것이죠. 체리과 열매인 카시스로 만든 리큐르를 럼, 복숭아 리큐르와 혼합한 뒤 얼음가루로 채워진 잔에 부어 만듭니다. 카시스 프라페가 유명해진 것은 특별한 용도 때문입니다. 연인들이 키스하기 전에 입안을 헹굴 때 마신다고 하네요. 짓궂은 바텐더는 카시스 한 모금을 입으로 전달하도록 권하기도 합니다. ‘사랑한다면 입에서 입으로’라는 것이죠. ‘키스를 부르는 칵테일’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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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터키간의 키프러스 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터치 오브 스파이스>

다시 프라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프라페는 그리스의 이웃 나라인 터키에도 전파됩니다. 그게 뭔 큰 의미냐고요? 그리스와 터키는 한일 관계처럼 가깝고도 먼 나라 사이입니다. 앙숙 관계죠. 그리스는 1453년 오스만제국(터키제국)이 동로마제국을 정복한 이후 400년 가까이 터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는 19세기 초반 독립운동을 벌여 1830년 3월 25일 터키로부터 독립했죠.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 기간보다 10배나 많은 시간 동안 식민지로 있었으니, 터키에 대한 그리스의 원한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세옹지마라는 말처럼 두 나라의 관계가 역전된 것은 1912년 그리스가 발칸 4국 동맹국(그리스,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세르비아)의 일원으로 제1차 발칸전쟁에 참여하면서부터입니다. 그리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해 크레타 섬을 되찾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 에게 해의 섬들을 자국 영토로 편입했습니다. 한때는 심지어 터키 본토인 아나톨리아 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했습니다. 지도를 보면 터키 코앞에 있는 대부분의 섬들이 그리스 영토로 표시된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죠. 지중해 동쪽에 있는 섬나라 키프로스를 둘러싼 그리스와 터키의 분쟁이 그렇죠. 키프로스는 그리스계와 터키계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심했죠. 그리스와 터키는 배후에서 동포들을 도왔습니다. 분쟁이 마무리될 무렵 그리스는 욕심을 부립니다. 키프로스를 병합시키려고 키프로스의 그리스계가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지원한 겁니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터키는 동포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키프로스를 침공하고 섬의 37%를 장악합니다. 현재 키프로스는 그리스계의 키프로스공화국과 터키계가 장악한 북키프로스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리스 영화 <터치 오브 스파이스(A touch of spice)>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느낄 수 있습니다. 
1997년 7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은 화해 원칙에 관한 합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긴장관계가 완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제 또 다시 갈등이 폭발할지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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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페를 설명하면서 참 많은 걸 이야기했네요. 그런데 말이죠. 그리스인들도, 터키인들도 카페에 앉아 프라페를 맛있게 마실 겁니다. 프라페 잔을 부딪치며 차츰 원한을 풀었으면 싶네요. “야마스(그리스어 건배)!”, “쉐레페(터키어 건배)!”하고 말입니다. 

글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