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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18세기와 21세기의 미국

티파티와 커피파티, 음료는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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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티파티 회원들이 ‘이미 세금은 낼만큼 냈다(Taxed Enough Already : TEA)’고 쓴 팻말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by a1mega, flickr (CC BY)

경복궁 뒷길에 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차와 커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일행 중 누군가 재미있는 질문을 던졌다. 차와 커피가 함께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은 없을까? 저마다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커피에 대해 말하고 차에 관해 떠들었지만 공통점을 찾기 쉽지 않았다. 평소 차와 커피를 즐기는 친구들이라 그 자리에서 해답이 나오지 않자 조금 겸연쩍어하는 표정들이었다. 그 때 누군가 제안을 했다. 돈을 조금 걸고 내기를 하자는 것. 다음에 만날 때까지 커피와 차의 연관성에 관해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내기에 건 금액을 몰아주자는 것이다. 모두 동의하고 지갑을 꺼냈다. 지금 하는 이 이야기는 그 내기를 준비하면서 찾아낸 일종의 ‘답안’인 셈이다.

2009년 미 국회의사당으로 몰려든 사람들

우선 티파티(TEA Party)와 커피파티(Coffee Party)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건 일종의 말장난 같은 거다. 견줄만한 게 있다면 창작물에 관한 지적 재산권을 의미하는 카피라이트와 창작물에 대한 사회적 공유를 주장하는 카피레트프 같은 개념 정도이다. 카피라이트라는 단어는 원래 있었지만 카피레프트는 라이트, 즉 권리라는 뜻을 오른쪽의 반대 개념으로 갖다 쓴 것이다.

마찬가지로 티파티와 커피파티도 이해할 수 있다. 티파티는 역사를 갖고 있는 용어이지만 커피파티는 티, 즉 차에 반대되는 개념을 갖다 쓴 것이다. 이때 말하는 역사적 사건은 미국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된 흔히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부르는 ‘보스턴 티파티(Boston Tea Party)’를 말한다. 티파티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2009년 미국 국회의사당 서쪽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들은 스스로를 보수적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단체 이름을 티파티운동(TEA Party Movement)으로 소개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보수적 성격의 단체들이 오바마가 추진하려던 의료보험 개혁정책을 계기로 집단화한 것이다. 이 운동가들은 개인, 작은 정부, 미국 역사의 가치와 전통을 존중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들은 오바마가 펼치려던 복지 정책을 극렬히 반대한다. 전 국민 의료보험과 사회보장제도, 복지프로그램 등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극우보수단체이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복지를 추진하는 큰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부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제약들이 최소화하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이미 세금은 낼만큼 냈다(Taxed Enough Already : TEA)’고 쓴 팻말을 흔들며 거리를 행진한다. 그들의 이름이 티파티(TEA Party)가 된 이유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복지라는 이름으로 보호하기 위해 중산층과 부자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들은 복지정책을 신랄히 공격한다. 심지어 이들은 흑인을 ‘깜둥이’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인종차별단체라는 오명까지 얻고 있다.

반면 커피파티는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을 지지하고 복지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진보적 단체를 의미한다. 티파티라는 이름에서 티를 빼고 커피를 넣어 새로운 명칭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보수 단체의 이름이 티파티라면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이 조직한 단체의 이름은 커피파티라는 것. 이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의 지향점은 티파티 단체와 대척점에 있다. 최근 미국의 정책적 갈등이 결국 세금문제에서 비롯된 것처럼 티파티의 어원이자 미국 독립전쟁의 계기가 된 보스턴 차 사건 역시 내용을 들여다보면 세금 문제와 관련이 깊다.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부터 최근의 정부정책에 대한 반발까지 결국은 세금문제였던 것이다.

1773년 ‘자유의 아들들’의 티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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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차 사건을 그린 그림.

1773년 12월 16일 저녁 보스턴 항구는 유난히 조용했다. 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인디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항구는 이내 긴장감에 휩싸였다. 얼굴에 석탄가루를 잔뜩 묻혀 누군지 뚜렷이 구분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대부분 손도끼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단체행동을 하려는 의도라는 것쯤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지도자로 보이는 세 명이 신호를 보내자 150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세 무리로 나누어 정박 중이던 세 척의 배로 일사분란하게 뛰어올랐다. 이들의 정체는 ‘자유의 아들들’로 불린 보스턴 백인 주민들이었다. 세 그룹으로 나누어 50여 명씩 무리를 지어 올드사우스 교회에서부터 출발한 이들은 인디언인 모호크족으로 변장해 이번 비밀행동이 불러올지 모르는 징계와 처벌을 면하려 했다.

중국에서 가져온 차를 하역하기 위해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의 선원들은 인디언으로 위장한 백인들에게 순식간에 둘러싸였다. 선박의 소유주는 영국 동인도회사였다. 배로 뛰어든 사람들의 리더가 화물칸으로 내려가는 갑판의 열쇠를 요구하자 선장은 사태의 심각함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 리더 중의 한 사람은 미국 건국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새뮤얼 애덤스였다. 그는 일행들을 통솔해 비밀결사의 작전을 무사히 성공시킨다. 그들은 동인도 회사 소유의 무역선 선원들과 큰 충돌없이 다음날 하역을 기다리던 무역품을 모두 끄집어내는 데 성공한다.

체념한 선장은 배의 파손을 막기 위해 그들이 중국으로부터 실어왔던 무역품을 포기했다. 그 무역품은 중국 푸젠성 우이산에서 생산된 우이옌(武夷嚴) 차였다. 모두 342상자에 들어 있던 차가 도끼를 든 백인들에 의해 보스턴 겨울바다에 뿌려졌다. 이날 저녁에 벌어진 일이 후에 ‘보스턴 차 사건’으로 알려진 ‘보스턴 티파티(Boston Tea Party)’이다.

사건의 일련의 사정을 살펴보면 이 일은 결국 미국의 식민지 반군이 영국 동인도회사 소유의 값비싼 차 상자를 파괴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트머스, 엘리너, 비버 등 세 척의 동인도회사의 배는 다음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깨끗이 청소가 돼 있었다. 부서진 차 상자는 바다로 버려졌고 차 상자를 약탈한 보스턴 ‘자유의 아들들’은 각 배의 일등 항해사들에게 자신들이 배를 파괴한 적은 없다는 확약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부러트렸던 화물칸의 열쇠를 수리하기 위해 열쇠공 한 명을 보내주었다.

경제적 이득보다 정치적 명분인 자치 선택

이들이 금전적으로 상당한 가치였던 차를 일부러 버린 이유가 무엇일까?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두 종류의 차가 인기리에 팔리고 있었다. 하나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에서 수입하는 차였고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밀수하는 차였다. 당시 차에 대한 인기는 대단했다. 지금 소비되는 커피의 대중적 인기를 차가 누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차에 대한 수요는 영국 본토를 비롯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증가하고 있었다. 수요가 증가하자 가격은 점차 올라갔다. 어느 새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밀수 차가 점점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영국 의회는 발 빠르게 차에 관한 세법을 통과시켰다. 차에 관한 관세를 실질적으로 없애도록 조취를 취한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는 동인도회사가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식민지인들과 직거래를 하게 하면 밀수도 사라질 것으로 판단했다. 얼핏 생각하기에 영국 본토의 차에 관한 조례는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에게 이익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부분에서 터져나왔다. 경제적 실리와 정치적 명분 사이에서 영국 본토인들과 아메리카 식민지인들 사이에 뚜렷한 인식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식민지인들은 경제적 이득보다 정치적 명분인 자치를 선택했다. 보스턴 차 사건이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평가는 이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쉽게 말해 돈보다 독립이라는 정신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이후 미국 독립의 신성한 상징으로 남게 된다.

한편 이 사건의 파장은 식민지 여러 지역에서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가정에서는 영국 차의 불매 운동을 지지하는 바람이 불었고 여성들은 ‘자유의 딸들’이라는 결사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차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식민지의 애국파 지식인들은 더욱 대담하게 그들의 주장을 펼쳤으며 영국의 보수파는 더욱 강경한 노선을 걷게 되었다.

찻잔 속의 ‘미국 역사’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불만은 ‘대표가 없으면 과세도 없다’는 슬로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식민지에서 세금이 사라지면서 훨씬 싼 차를 마실 수 있었지만 식민지인들은 원칙을 더 중요시했다. 그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차 조례가 만들어지는 입법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가 있다고 위법성을 제기한 것이다. 식민지인들은 식민지에서 대표를 선출해 영국 의회에 자신들의 견해를 제시한 바 없다는 점에서 영국 의회의 결정은 위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차  조례는 식민지 자치기구가 결정하지 않았으므로 영국의회의 과세는 권한이 없는 위법이라는 것이다.

비록 아메리카가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식민지인도 영국인과 똑같은 자유와 권리를 가진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또한 차 조례는 오랜 식민지 의회의 자치 원칙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영국헌법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에서 보자면 보스턴 차 사건은 값나가는 물건을 불법으로 강탈한 범법행위가 아니었다. 자유와 자치를 지키기 위한 독립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을 주도한 이들이 결사의 이름을 ‘자유의 아들들’이라 부른 것도 그들이 추구하는 자유정신을 드러내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차 한 잔과 커피 한 잔은 단순한 음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의 방향을 바꾸면 세계는 훨씬 재미있고 궁금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차 한 잔을 스푼으로 저을 때 일어나는 작은 물결 안에 어떤 재미있는 스토리가 맴도는지 생각해보라. 역사를 흔든 사건은 모두 사람들이 한 것이었고 그들은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차든 커피든, 음료를 마시고 있지 않았겠는가.

글 | 오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