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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스토리텔링
[음료기행] 석류

절절한 사랑과 회한이 알알이 맺혔다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 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아, 사랑하는 이여 
지구가 쪼개지는 소리보다 
더 아프게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_이가람, <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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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을 쪼개어 고백한 사랑

석류는 여름 내내 붉게 익힌 알맹이를 품다가 가을에 반쯤 입을 벌린다. 시인은 그 모습에 꽂혔다.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어 스스로 몸을 연 석류는 간절한 사랑과 닮았다. 알알이 박힌 알맹이는 켜켜이 쌓인 그리움이다.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온몸을 쪼개어 사랑을 고백한다.

시조시인 조운의 <석류>도 사랑의 마음을 절절하게 전한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게 젖힌/ 이 가슴.” ‘빠게 젖힌 가슴’이라는 표현이 압권이다. 이래도 내 사랑을 모르겠소?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도 석류를 노래했다. 그는 “알맹이들의 과잉에 못 이겨 방긋 벌어진” 석류를 보며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졌다. “내 옛날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스런 구조를 꿈에 보게 한다.” 
저 알맹이들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만들어진 거지? 시인의 성찰은 이유 없는 게 없고 세상 만물이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과 닿아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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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Botticelli)의 ‘석류의 성모’

석류는 지름 6~8cm의 둥그스름한 모양이고 색은 붉다. 속은 작은 알맹이들이 빼곡하다. 새콤달콤한 즙을 가득 품었다. 이화석의 시 <석류>는 침샘을 자극한다. “시디신 이빨 꼬옥 물고/ 참다가...참다가...참...다.../그만 까르르르// 입술 열어 쏟아 놓은/웃음조각.” 흐른 침 닦으시고.

기원전 3천년 경 페르시아에서 발견

석류 원산지는 서남아시아(페르시아 지역)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초기 중국에서 들어온 듯하다. 현재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재배되고 있다. 5~7월 꽃이 피고, 9~10월 열매를 맺는다. 석류라는 이름은 중국 한나라 때 장건이 안석국(安石國, 지금의 페르시아)에서 들여온 것에서 유래한다. 초기에 ‘안석국의 류’라고 해서 ‘안석류’로 불렸다. ‘류(榴)’는 혹처럼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나무를 뜻한다. 

석류는 인류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페르시아 지역에서 기원전 3천년 경 발견되었다고 한다. 구약성서를 비롯해 이집트, 그리스, 중국, 인도 의학서 등에 석류의 효능이 언급되어 있다. 클레오파트라, 양귀비도 석류를 즐겨먹었다고 전해진다.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인류문명의 역사와 함께 해온 석류는 그 모양과 효능 때문에 다산, 풍요,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우리나라 전통 혼례복 문양을 보면 석류, 포도 등의 문양을 새겼는데,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보티첼리의 그림 ‘석류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석류를 든 성모자’의 석류는 예수의 부활을 뜻한다. 

스페인 최후 이슬람왕국, 그라나다의 석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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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과 함께 해온 석류는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문학, 미술 등 예술작품의 단골 소재였다. 알고 보면 사연 많은 과일인 셈이다.

이슬람 문학가인 타리크 알리의 소설, <석류나무 그늘아래>는 영광의 추억과 슬픔을 담았다. 스페인 최후의 이슬람왕국 그라나다의 한 이슬람 가문의 이야기다. 1492년 그라나다의 술탄은 십자군의 압박에 전쟁 대신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평화를 선택했다. 십자군은 무슬림(무어인)의 종교, 문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499년 말 십자군은 그라나다 도서관의 책들을 한 곳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약속은 파기되었다. 영혼의 씨를 말리겠다는 선전포고였다. 가장은 고뇌한다. 어찌할 것인가. 기독교로 개종해 가문을 보존할 것인가, 저항하며 죽을 것인가.

그 즈음 40여 년 만에 가장의 여동생이 고향에 돌아온다. 마을 어귀 석류나무 숲을 보자 쓰라린 사랑의 추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반세기 동안 자신의 머릿속을 철저하게 정화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삶이란 건 얼마나 기만적인가. 그녀는 집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며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석류나무 과수원이 보였다. (중략) 과수원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집안 막내아이의 눈에도 상황은 심각해 보였다.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을 것 같은 예감. 뭔가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야지드는 석류나무 숲의 빈터에서 무어인 기사 흉내를 내는 중이었다. 야지드는 미친 듯이 달리며 가짜 칼을 휘둘러 주위 모든 석류나무의 목을 베고 있었다. (중략) 야지드는 자신이 정복한 열매 하나를 쪼게 그 즙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입안에 들어온 씨들은 내뱉었다.”   

저항을 선택한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목이 잘린 아버지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잊지 마라, 아들아, 우리는 늘 정복당한 자들을 처리하는 방식에 자부심을 느껴왔단다. 네 증조부는 자신에게 패배한 기사들을 초대해 우리 집에 머물게 하며 함께 식사를 했지. 우리가 저들과 똑같이 행동하면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라.” 

적에게 잡힌 아이는 지휘관에게 말한다. “오늘 밤 우리 집에 내 손님으로 머무시겠소?” 이에 격분한 지휘관의 칼에 아이도 죽었다. 피가 선연했다. 석류 열매는 붉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회한

최일남의 소설 <석류>는 자식을 먼저 하늘로 보낸 어머니의 회한이 스며있다. “죽기 며칠 전 누이는 어머니가 건넨 탕약 대접을 본체만체 ‘석류가 먹고 싶네’ 했을 때는 눈물부터 훔쳤다. 어디를 어떻게 뒤졌는지 검붉게 말라비틀어진 석류 두 알을, 말라빠지기는 매한가지인 누이 손에 쥐어주었다. 숙진이는 고맙다고 힘없이 웃고, 어머니는 목이 메는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뿐이었다.”

어머니에게 석류는 평생의 회한이었다. 세월이 흘러 주인공은 한밤중 거실에서 뭔가를 먹고 있는 어머니를 보고 흠씬 놀란다. 
“세상 참 좋아졌더구나. 이 겨울에 석류가 어디냐. 크기는 또 얼마나 크다고. 친렌가 찔렌가 하는 나라에서 수입한 거라는데 맛도 괜찮다. 너도 와서 먹어.” “그렇다고 한밤중에 자실 건 없잖아요.” “아무 때 먹으면 어때. 잠도 안 오고.... 나라도 대신 먹고 가야 숙진이 고것한테 할 말이 있지.”

석류를 반으로 쪼개본다. 빼곡히 들어찬 알맹이가 실하다. 전라도 사투리로 표현하면 ‘오메, 징한거.’ 하나씩 떼어 먹으니 감질난다. 톡톡 털어 한 움큼 입에 넣었다. 즙이 흥건하다. 시큼하고 달콤하다. 

석류 건강백서

당질이 약 40%, 신맛을 내는 시트르산이 약 1.5% 함유되어 있다. 석류의 신맛은 노화방지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동신경, 시신경에 좋은 수용성 비타민 B1, 기억력 감퇴, 알츠하이머 예방 효과가 있는 B2, 구강염에 효과적인 나이나신 등도 들어있다. 
여성 갱년기 장애에 좋다는 천연식물성 에스트로겐 성분도 1kg당 17mg 정도 함유되어 있다. 때문에 석류를 이용한 여성호르몬 요법이 늘고 있다. 한의학에서도 석류는 음혈을 가두어주는 효능이 있는 약재로 이용된다. 
껍질에 있는 탄닌 성분은 소화액 분비를 촉진해 입맛을 돋워주고, 에너지대사를 도와 피로를 빠르게 회복시켜준다. 

글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