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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in 가요] 로맨티스트의 애절한 세레나데

이장희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커피 in 가요] 로맨티스트의 애절한 세레나데 |

통기타를 맨 일군의 젊은 가수들이 대중 속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건 70년대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와 은희의 <꽃반지> 등은 대학가의 통기타 붐을 부추기며 신세대의 애창곡으로 자리 잡았고 사춘기 청소년들과 대학생, 20대의 젊은이들이 즐겨 듣던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이 불러일으킨 모던 포크 바람은 하루가 다르게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 시절 임국희, 최동욱, 피세영, 이종환 등의 인기 DJ들이 진행하던 심야 방송은 청년 문화를 홍보하는 전도사나 다름없었다.  

록큰롤의 강렬한 사운드를 재현할 문화적 토양이 빈약하던 시절, 통기타는 미성숙한 한국 자본주가 허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외래 문화였다. 암울하고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식은 기존 세대와 결을 달리하는 서구 청년문화에 절대적인 호의로 나타났고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이장희, 김민기, 양희은 등은 데뷔와 함께 젊은이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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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강렬했던 전성기…‘한잔의 추억’

통기타 붐이 한창 뜨겁게 타오르던 1974년 9월 17일자 <경향신문> 연예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가수 이장희 군의 콧수염이 이번엔 영화계에서 수난을 겪고 있다. 자신의 히트송과 동명 타이틀의 영화 《한 잔의 추억》에 2백만 원을 받고 출연계약을 끝낸 이 군은 최근 영화사측으로부터 “수염을 깎아달라”는 괴로운 요청(?)을 받고 고민에 빠져 있다. 지난 8월, 3개 TV국으로부터 “콧수염이 시청자들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출연이 금지된 이래 이 군은 또 다시 영화사측으로부터 수염을 깎을 것을 요청받음으로써 ‘수난 2라운드’를 맞은 셈.

영화사측은 “영화 속에서 콧수염을 깎는 장면을 연출하겠으니 이 기회에 깎는 게 어떠냐”고 달래고 있는데 이 군은 오로지 상처를 가리기 위해 기른 것뿐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거듭 주장하면서 “그럴 바에야 차라리 출연을 포기하겠다”고 완강한 태도를 보여 스탭들을 당혹케 하고 있다.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한 잔의 추억>이란 노래의 빅 히트로 인기 정상을 달리던 가수 이장희가 콧수염을 깎으라는 영화사의 요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제작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이장희를 주연으로 한 이 영화는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인기 여배우들이 이장희의 상대역으로 물망에 오르면서 제작 소식만으로도 도하 일간지를 떠들썩하게 장식하고 있던 참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그해 추석 개봉을 목표로 제작에 들어가려던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이장희에게 영화사가 계약서엔 없던 콧수염 밀기를 요구하면서부터 불거졌다. 하지만 이장희는 요지부동이었다. 급기야 그의 입에서 출연을 취소하겠다는 말이 튀어 나왔다. 아래는 위 기사가 보도된 지 20여일 후인 10월 6일자 신문의 내용이다.

영화협회 시나리오분과위원회에선 영화 <한잔의 추억>에 출연할 가수 이장희 군의 “시나리오가 저질이라서 출연할 수 없다”는 발언에 대해 공식적인 해명이 있기 전엔 동 영화의 시나리오 집필을 거부키로 했다. 동 영화는 크랑크 인에 앞서 이 군의 콧수염 시비가 일더니 이젠 시나리오 저질 시비로까지 비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가운데 시나리오 작가들의 집필거부 소동까지 일으켰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장희는 70년대 청년문화의 한 가운데 서 있던 인기절정의 가수였다. 시나리오 수준까지 탓하며 주연배우가 출연 불가를 선언함에 따라 결국 영화 제작 자체가 수포로 돌아가 버린 이 사건은 가수 겸 작곡가, 방송 DJ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 이장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해프닝이었다.

작사, 작곡에 재능을 보인 음악신동

1947년 경기도 오산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이장희는 음악신동이었다. 가수가 될 운명이었는지 어린 시절 울보로 유명했다던 이장희는 네 살 때 천자문을 뗐고, 고교 동기생 480명 가운데 460등의 졸업 성적에도 불구하고 벼락치기 공부를 통해 연세대 생물학과에 입학할 만큼 명석했다. 당시 최고 명문으로 꼽히던 서울중, 서울고를 다녔지만 학업엔 별 욕심이 없었다. 기타 역시 학창시절 독학으로 배웠다.

그가 처음 음악에 뜻을 둔 것은 중학생 때 삼촌 친구인 가수 조영남이 집에 놀러왔다가 들려준 기타 연주와 노래에 반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 이후 이장희는 AFKN 음악프로를 들으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웠고, 기타를 빌려 연주와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고교시절 이장희는 이미 팝 음악 500여 곡의 반주와 가사를 줄줄 외울 만큼 뛰어난 음악적 자질을 드러냈다.

학창 시절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음치라고 놀림을 받던 그의 꿈은 남들 앞에서 멋지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가수는 미국 컨트리 음악의 선두주자인 행크 윌리암스(Hank Williams)였다. 훗날 이장희의 음악적 취향이 되는 단순한 화음, 쉬운 멜로디, 일상어 위주의 가사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대학에 들어간 그는 고교 시절 동창생의 소개로 같은 대학 의예과에 다니던 윤형주와 첫 대면했고, 그와 함께 남성포크 트리오를 결성해 잠시 활동했다. 하지만 몇 달 후 윤형주는 송창식과 ‘트윈 폴리오’를 결성해 활동 무대를 옮겼고, 이장희 역시 ‘베가본드’라는 밴드에 몸담으려 음악적 노선을 달리했다. 이때 그에게 뜻하지 않은 사고가 벌어졌다. 서울대 입학을 위해 학교에 적을 둔채 재수생활을 하던 중 친구들과의 주먹싸움에 휘말려 왼쪽 눈의 시력을 거의 상실해 버린 것이다. 이 사고로 이장희는 학교를 중퇴해버릴 정도로 크게 좌절했다.

다행히도 이 무렵 이장희는 홍익대에 다니던 강근식을 만나 친교를 맺는다. 둘의 첫 만남은 1968년말 소공동에 있는 ‘멕시코’라는 살롱에서였다. 우연한 기회에 음악 이야기를 나누게 된 두 사람은 금방 마음이 통해 포크 듀오를 결성하기로 약속했고, 명동 ‘코스모스’와 ‘오비스 캐빈’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강근식은 이후로도 그의 음악적 동지이자 평생의 친구로 남은 오랜 우정을 나누었다. 하지만 둘의 듀오 활동은 극히 짧았다. 하필 그 무렵 강근식에게 난데없이 입대 영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포크 초창기 대표 싱어송라이터

이 당시 이장희의 음악친구였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은 이미 적잖은 팬을 거느린 인기가수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실명에 가까운 눈 부상과 강근식의 군 입대로 다시 실의에 빠진 이장희는 미술을 전공하던 친구의 작업실에 머물며 마음 가는 대로 곡 작업을 하는 것으로 울적해진 마음을 추슬렀다. 재미있는 것은 훗날 이장희의 유명세를 빛낸 수많은 히트곡들이 이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971년 그의 데뷔곡인 ‘겨울 이야기’를 비롯해 송창식이 히트시킨 <애인>과 <비의 나그네>도 세상의 밑바닥으로 가라 앉아 기약 없는 화실 생활을 이어가던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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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KBS라디오의 DJ 제안을 받으며 다시 음악생활을 시작한 이장희는 ‘세시봉’의 터줏대감이자 인기 DJ였던 이종환의 권유로 그해 한 옴니버스 앨범 구석에 ‘무지개’와 ‘겨울이야기’라는 두 곡의 노래를 취입하며 가수로써의 출사표를 던진다. 이듬해인 1972년, 이장희는 자신의 첫 독집앨범을 내놓으며 마침내 대중들의 뇌리에 뚜렷한 존재감을 새기게 된다.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데뷔앨범 <이장희(유니버샬레코드)>는 모두 9곡의 창작곡과 하나의 번악곡으로 구성되었는데 당시 음반 전체를 자신의 자작곡으로 채울 만큼의 역량을 가진 포크싱어는 김민기와 이장희 정도뿐이었다.
 

1973년 1월 1일부터 당시 가장 영향력이 크던 동아방송 ‘0시의 다이얼’ DJ가 되면서 이장희의 인기는 고공행진으로 접어들었다. 곧이어 그의 두 번째 독집앨범이 발매되면서 남성적이고 중후한 중저음을 가진 이 젊은 포크 가수는 거칠 것 없는 인기 상종가를 달렸다. 이듬해 발매된 그의 세 번째 독집앨범 또한 한 해 동안에 무려 5만 장이 팔려나가는 빅히트를 기록하며 이장희는 명실상부한 톱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 3집 앨범 속의 <그건 너>와 <자정이 훨씬 넘었네>로 촉발된 그의 인기는 해가 바뀌어도 식을 줄을 몰랐다.

이듬해인 1974년은 이장희에게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3년 넘게 교제해온 연인과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대 불문과 출신의 아리따운 신부는 이장희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로맨티스트였던 이장희는 자신의 절절한 심경을 담은 사랑의 세레나데를 작곡해 피앙세에게 헌상했다. 그 노래가 바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는 곡이다.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밤 눈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드릴 게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게 있네

훗날 이장희의 회고의 의하면 이 노래는 원래 동료가수인 김세환에게 주기로 약속한 곡이었다. 하지만 노래를 들어본 신부는 “날 위해 만든 노래를 왜 다른 가수가 부르느냐”며 남편이 직접 불러줄 것을 요구해 결국 이장희의 중저음으로 녹음돼 발표되었다.

이 노래는 가히 이장희 음악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명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남자의 여린 감성과 천재성이 포크라는 음악 장르 속에 깊이 녹아든 것 뿐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직설적이고 감미로운 가사, 복잡하지 않은 멜로디 등 이장희 음악의 매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노래는 이듬해인 1974년 한국 영화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화제작 <별들의 고향>의 OST로 첫선을 보여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지금도 많은 중장년 팬들은 이 영화를 얘기할 때마다 극장 안에 울려 퍼지던 이장희의 나지막한 중저음과 감미로운 가사를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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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별들의 고향> 포스터.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첫선을 보였다.

여담이지만 그 후 일 년 만에 후반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활동금지 처분을 받고 가요계를 은퇴, 미국으로 떠났던 이장희는 80년대 초반 이 노래의 주인이던 아내와 합의 이혼했다. 당시 그가 LA 한인타운의 한 공연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던 중 2절 가사를 까먹고 머뭇거리자 이혼 때문에 감정이 북받쳐서 그런 것이라 짐작한 청중들이 우레와 같은 격려의 박수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훗날 이장희의 고백에 의하면 자신은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가사를 잊어버렸던 것뿐이라고.
미국에서 한인방송사 ‘라디오코리아’로 사업적 성공을 거둔 이장희는 2000년대 중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울릉도에 거주하며 틈틈이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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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