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찻잔 스토리텔링
“추억의 신청곡을 받습니다”

현역 유일 ‘음악다방 DJ’ 장민욱

[찻잔 스토리텔링]“추억의 신청곡을 받습니다” |

‘7080 세대’의 추억이 깃든 음악다방이 세월의 흐름 속에 하나둘 문을 닫고 사라지면서 졸지에 장민욱은 현역 유일의 음악다방 DJ로 남고 말았다. 함께 활동하던 옛 DJ 동료들이 쓸쓸히 퇴장해 버리고, 자신 또한 흐르는 세월을 거스를 순 없게 되었지만 이 초로의 노신사는 오늘도 변함없이 종로의 한 음악다방에서 무대를 지키고 있다.
1976년, 구로동 동원다방에서 떨리는 손으로 음반을 집어 들 때만 해도 음악을 향한 스무 살 청년의 연정이 이토록 오래 이어질 것을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외롭고, 높고, 쓸쓸한’ DJ 장민욱의 반세기 음악 이야기에 귀기울여본다.  

 

찻잔1.jpg

1976년부터 시작된 음악다방 DJ

아직도 현업으로 활동 중인데 괜히 손님들 환상만 깨버릴까 봐 정확한 나이는 밝히지 않는 편이 낫겠네요. 올해 대략 60대 중반이라는 것만 귀띔해 두겠습니다.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은 서울 구로동입니다. 4살 때 갑자기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외가가 괜찮게 사는 편이라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렵진 않았어요. 당시로는 귀했던 라디오가 집에 있어서, 어려서부터 음악을 즐기며 학창시절을 보냈죠.  

어릴 땐 공부도 제법 했는데 중학교 때부터 음악에 깊이 빠져 공부에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결국 일반고가 아닌 상업 전수학교로 진학한 뒤 검정고시를 쳐서 고졸 학력을 인정받았어요. 어머니께서도 생전에 많이 아쉬워하셨어요. ‘음악만 아니었으면 너는 공부로 출세했을 텐데…’라는 한탄이었죠.
하지만 저는 무작정 음악이 좋았어요. 대학 예비고사를 본 뒤 합격자 발표도 안 났는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녔죠. 신학대학에 다니며 구두닦이 아르바이를 하던 동네 형 밑에서 ‘찍새(여러 사무실을 돌며 구두를 수거해 오는 역할이죠)’ 노릇도 좀 했습니다. 낮에는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서 구두 모아오는 일을 하고, 저녁이면 동네 다방에 죽치고 앉아 음악이나 들으며 시간을 때우곤 했죠. 그런데 그게 운명이었어요. 거기서 처음 다방DJ라는 직업을 알게 됐으니까요.  

엉겁결에 음악다방 DJ로 데뷔한 게 1976년 4월입니다. 그 무렵엔 영등포 일대에 다방이 많았어요. 대학다방, 본전다방, 돌체다방, 연흥다방, 꽃샘다방, 영다방 등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지요. 심지어 건물 하나에 네댓 개의 다방이 들어서 있는 게 흔한 일이었고, 좀 과장하자면 역 주변엔 한 집 건너 하나씩 다방이 있었습니다. 유동인구도 엄청 많았죠. 근처 가리봉동, 구로동, 독산동 쪽에 사는 산업근로자들이 퇴근 후 전부 영등포로 놀러 나오던 때였으니까요. 종로나 명동까지 갔다 오기엔 부담이 되니 공장이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들 자연스럽게 영등포 일대 다방이나 분식점, 빵집 같은 곳에 모여들던 시절이었죠.  

그때는 가정에 오디오 시설이 없으니 주로 그런 곳에 모여 음악을 들었습니다. 영등포 상아탑다방 같은 곳은 ‘송 선배’라고 부르던 DJ가 직접 미군기지촌 같은 데서 LP원판을 구해와 좋은 음악을 많이 소개해주는 걸로 유명해 음악 좀 듣는다는 손님들이 많이 갔지요.  

음악다방 전성시대의 주역

찻잔3_s.jpg


종로나 명동 같은 시내 음악다방은 오후 두세 시부터, 영등포 음악다방들은 보통 오후 6시~7시부터 시작됩니다. 낮에는 마담이나 레지들이 중장년 손님들한테 커피나 쌍화차를 파는 일반 다방으로 운영하다가, 날이 어둑해지면 음악다방으로 변신해 젊은 손님들로 물갈이를 하는 거지요. 손님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전문DJ를 고용하기 시작한 게 음악다방의 시초라고도 합니다.
커피 이야기가 나왔으니 덧붙이면 당시는 믹스커피가 대중화되기 전이라 원두커피를 마셨어요. 미주상사라는 회사에서 깡통에 든 원두를 수입 판매했는데 다방 주방장들이 그걸 갈아서 일종의 커피를 내려줬죠. 뜨거운 물을 부으면 통통통, 하고 커피 물이 내려오는데, 믿기 어렵겠지만 손님들이 맛이 좀 싱겁다고 하면 소금을 섞어 내가기도 했습니다.  

영등포의 경우 손님들이 많지 않은 초저녁엔 보조 DJ가 올라가고, 골든타임인 8~11시 사이엔 메인 DJ가 들어가는 시스템이었죠. 신청곡도 성향 차이도 좀 있었죠. 종로나 명동 쪽은 대학생 손님이 많으니 팝송과 가요 비율이 6대4 정도였던 반면에 제가 활동하던 영등포쪽은 7대3 혹은 6대4 정도로 가요 신청곡이 많았습니다.  

제 데뷔 무대인 구로동 ‘동원다방’도 제법 음악 수준이 높다고 소문이 나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던 곳입니다. 어느 날 DJ가 펑크를 내고 연락두절이 되자 업소 사장이 급하게 제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오더니 “야, 너 올라가서(DJ박스는 손님들 앉아 있는 자리보다 좀 높게 만드는 게 일반적입니다) 멘트는 하지 말고, 그냥 음악만 틀어!” 하고 부탁을 하더군요. 또래 친구들 중엔 그래도 제가 음악 좀 듣는다는 소문이 나 있던 덕분이죠.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그러마, 하고 DJ석에 들어가 앉았는데 갑자기 손이 덜덜 떨리더라고요. 옛날 다방엔 대부분 홀 중앙에 큰 수족관 같은 걸 놓았는데, 주변 좌석을 꽉 채운 수백 개의 눈들이 전부 나만 바라보고 있더란 말이에요. 자주 놀러가긴 했어도 음악만 듣고 갔지, 어떤 음반이 어디 있는지 제가 뭘 알아야죠. 다행히 의자 밑에 LP판이 몇 장 놓여있기에 살펴봤더니(손님들이 자주 찾는 음반은 손에 닿는 곳에 두는 게 DJ들의 노하우에요) 마침 집에서 자주 듣곤 하던 사이먼&가펑클과 폴 앵카 음반이더라고요. 그렇게 간신히 음악 몇 곡을 틀어주고 나왔는데, 얼마나 심장이 떨리던지. 결과적으로 그게 내 데뷔무대가 돼서 50년 가까이 DJ일을 해오게 됐습니다.  

얼마 뒤 그곳 DJ가 일을 그만두게 돼서 엉겁결에 제가 계속 DJ를 맡게 됐는데 누구 밑에서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서 그때부터는 주변의 선배 DJ들은 어떻게 하나, 열심히 찾아가 귀로 듣고 눈으로 배워 직업적으로 DJ 일을 하게 됐지요. 커피 한 잔이 80원 할 때였는데, 첫 월급이 3,000원이었던 기억합니다. 돈만 생각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죠. 하지만 음악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일을 그만두지 못했습니다. 80년대 중반, 딱 1년 동안 DJ를 그만두고 친구가 소개해준 병원사무장으로 일해 보기도 했는데 적성에 안 맞아 다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돌아보면 70~80년대는 DJ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음악다방뿐 아니라 웬만한 분식집만 해도 DJ를 고용하던 시절이니까요.  

종로나 명동, 영등포 같은 곳은 물론 어린 친구들이 자주 찾던 신당동 떡볶이골목에도 서너 명의 DJ들이 활동하고 있었지요. DJ DOC(디제이 디오씨)의 노래에도 언급되는 ‘허리케인 박’이 당시 신당동 떡볶이골목을 주름잡던 DJ 동료였죠. 허리케인 박은 향학열이 높아 DJ 활동 중에도 방통대에서 법학을 공부할 만큼 노력을 많이 한 분이었는데 몇 년 전 저와 함께 ‘음악다방 DJ특집’ TV 프로그램(주부들이 많이 보는 <아침마당>이란 프로인데 방송 출연 뒤 저를 찾는 옛 동료들의 전화가 많이 왔다고 합니다)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DJ들이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게 스타 대접을 받던, 꿈같은 시절의 얘기입니다. 

준비된 DJ만 살아남던 시절

찻잔2_s.jpg


영등포에선 ‘본전분식’과 ‘연흥분식’이 DJ로 유명한 곳이었죠. 연흥분식은 상대적으로 DJ의 역할이 크지 않았지만, 본전분식엔 이른바 서울에서 제법 잘 한다고 평가받던 유명 DJ들이 많았습니다. 본전분식이 있던 자리가 영등포시장로터리 시장 입구인데 그 건물 지하에 ‘본전다방’이 있어 분식집에서 놀다 지루해지면 우루루 일어나 다방으로 내려가는 게 정해진 코스였어요. 본전다방 DJ들이 ‘개그DJ’로 제법 유명했습니다.  

DJ도 여러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개그DJ’는 말 그대로 웃긴 멘트로 손님들한테 어필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재밌는 이야기나 성대모사 같은 걸 선보여 인기를 끌었어요. 쉽게 얘기해서 쇼맨십이 강한 친구들이라 음악 얘기는 뒷전이고 웃기는 데만 관심을 쏟았지요.

그 다음에 ‘정석DJ’라고 부르는 분들은 멘트를 별로 안 한다거나, 아니면 음악에 관련된 멘트만 주로 하는 쪽이었어요. 프로그레시브 음악이 어떻고 헤비메탈이 어떻고 하며 음악이나 가수에 대한 설명 위주로만 멘트를 하는 거죠.  

가장 몸값이 높은 건 이른바 ‘상황멘트’를 할 수 있는 경험 많은 DJ들이었어요. 적잖은 경험을 필요로 하는 단계지요. 적당히 개그 멘트도 할 줄 알아야 되고, 음악 지식도 갖춰야 할 수 있죠. 매일 매일 세상 돌아가는 걸 눈여겨보다가 시사적인 얘기도 할 줄 알아야 손님들이 지루해 하지 않고 자주 찾아주었죠.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 하니까 DJ들도 아침마다 일간 신문을 열심히 찾아 읽었죠. 제 경우엔 연예 기사가 많이 실리는 스포츠신문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출근하면 꼭 신문부터 살피는 습관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부류의 DJ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손님마다 단골 음악다방도 다 달랐습니다. 음악 좀 안다는 사람들은 정석DJ가 진행하는 음악다방을 찾아가고, 좀 재미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개그DJ가 있는 곳에서 노는 게 그 당시의 다방문화였죠. DJ에 따라 손님 성향도 달라졌다고 보면 됩니다.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DJ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인기 DJ가 자기 타임을 끝내고 내려가면 손님들이 쭉 빠지는 게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죠. 업소 사장들도 그걸 알고 있으니 능력 있는 DJ를 데리고 오기 위해 점점 더 좋은 조건으로 잡아두려고 했죠. 이른바 ‘A급’으로 평가되던 인기 DJ들의 경우엔 하룻밤 두세 군데에서 겹치기로 뛰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내와 결혼한 게 86년도인데 그 당시엔 저도 제법 인기가 많아 하루 네 군데 업소를 돌며 일했지요.  

그땐 DJ들의 입김이 아주 셀 때라 새로 노래를 취입하면 가수들이 음반을 들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가끔은 다방에 와서 노래 공연을 하기도 했지요. 정태춘, 백영규, 조덕배, 최성수 씨 같은 분들도 제가 일하던 다방에 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음악다방이 흥할 때는 DJ들이 전국에 수 만 명은 됐을 겁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박원웅 형님(MBC 라디오에서 활동했던 전설적인 DJ지요)이 생전에 저에게 “아르바이트 삼아 해본 사람까지 포함하면 우리나라에 DJ가 최소 20만 명은 넘을 거야”라고 얘기하실 정도였죠.  

DJ는 철저히 손님들의 신청곡 위주로 선곡하는 게 철칙입니다. DJ 개인의 음악 성향을 강요하면 손님들이 불편해 하기 때문이지요. 간혹 업소 사장들이 선곡에 대해 간섭하거나 특정곡을 자주 틀라고 강요하면 “여기는 손님들이 신청곡 듣고 싶어 찾아오는 곳이지, 사장님 좋아하는 음악 듣는 데가 아니에요. 그런 노래 듣고 싶으면 댁에 가서 혼자 들으세요!” 하고 면박을 줘서 입을 막아버렸죠. 손님 없는 업소가, DJ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DJ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음반이지요. CD가 나오기 전까진 LP음반이 전부였고, 어느 경우든 LP는 전적으로 업소 측이 준비해줘야 했습니다. 요즘은 CD나 디지털 음원을 선호하지만 평생 음악과 함께 살아온 DJ의 귀엔 소리의 질감이나 깊이가 LP음반을 따라오지 못해요. 저도 한 때는 개인적으로 3만 장 이상의 음반을 갖고 있었는데 현재는 다 처분하고 8,000여 장만 남았습니다.
제 경험으론 업소에 최소 3,000장 정도는 갖춰야 지루하지 않게 디제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래방 문화가 확산되면서 음악다방이 점점 사라지는 추세가 되자 고작 500여 장만 갖다놓고도 ‘음악다방’을 자처하는 업소들이 생겨 허탈하기도 했지요.  

80년대 중반에 정점을 찍었던 음악다방은 아시다시피 90년대 이후 사양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제 기억으론 1991년 4월인가 문을 닫은 영등포 ‘지하도시’란 곳이 서울의 마지막 음악다방이었어요. 그 무렵 저도 현장에서 익힌 음악지식을 모아 책도 여러 권 펴내고, ‘DJ아카데미’를 설립해 360여 명이나 되는 후배들도 양성해 놓았는데 전부 허사가 되고 말았지요. 같이 활동하던 동료들도 일자리가 없어 하나둘 떠나버리는 걸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죠.
그 바람에 이제 그때부터 활동하던 정통 음악다방 DJ로는 전국에 저 하나만 남아 있는 셈입니다. 90년대 이후 저도 잠깐 일자리가 끊겨 이삿짐 아르바이트, 황학동 음반 노점상 등 온갖 일을 다 해봤습니다. 다행히 종로에 금방 일자리가 생겨 지금껏 DJ박스를 지켜오고 있지만 가끔 이 길이 참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음악다방은 7080세대들의 추억과 낭만이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종이에 사연과 신청곡을 써서 건네고, 지직거리는 LP음반으로 음악을 듣는 건 지금도 많은 중장년들이 그리워하는 추억입니다. 누구든 다시 ‘음악다방’ 같은 추억의 아이템에 관심을 가져 멋스런 공간을 다시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제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저 역시 그 동안의 경험과 조언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코로나19로 잠시 문을 닫았던 음악다방이 재오픈하면서 그는 요즘 종로3가 <청춘1번지>에 다시 출근해 특유의 중저음과 환한 미소로 손님들을 만나고 있다. 해박한 음악 지식과 재치 있는 ‘DJ 오빠’의 입담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손님들의 가슴 속에도 한동안 잊고 살았던 저마다의 추억들이 흰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DJ의 목소리가 장내에 퍼진다. “신청곡을 받습니다.”
 

찻잔4.jpg

글 |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