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찻잔 스토리텔링
‘큐픽’의 스토리텔링

기억이 머무는 곳에 사진이 있네

“시간 되면 한 번 들렀다 가라.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야.”
사진 개인전을 한다는 선배의 전화를 받은 건 늦은 오후였다. 주말에 어디 나들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에 도착한 건 일요일 점심시간 무렵이었다. <시간 지우기>라는 전시회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무슨 사진을 보게 될까 궁금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갤러리를 둘러보았다. 따뜻한 향이 묻어나는 커피를 마시며 선배에게 물었다.
“시간 지우기가 단순히 옛 일을 잊자는 건 아닐 테고. 이번 전시회는 어떤 이야기를 모아놓은 거예요?”
몇 작품을 가리키던 선배가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떼었다.
“시간은 그대로 기억되지 않아.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편집되면서 스토리처럼 남게 되는 거지. 어찌 보면 우리는 시간 속의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몰라. 기억 중에도 잊고 싶은 것도 있고, 절대로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도 있잖아. 현실의 경험이 이미지가 되고, 그 이미지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때 그 시절의 ‘사람’과 ‘일’들을 쌓아 두지. 결국 사진은 우리 삶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런 시간을 한 컷 한 컷 모아 작은 단편영화를 만들듯이 재구성해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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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사진전에서 호출된 기억

“사진들이 한 대상만 찍은 게 없네요. 여러 이미지들이 중첩돼 있어요. 꽃들 사이로 자전거가 보인다거나, 타자기가 있는 사진 뒤에는 흰 꽃들이 소담스럽게 놓여 있기도 하고. 담벼락 낙서 위에는 무용수들의 발이 드러나 있기도 하고요. 이런 작업이 표현하려는 건 어떤 건가요?”
내가 언급하는 사진들을 따라 선배의 시선이 돌고 있는 게 보인다. 마치 카메라로 그 사진을 찍을 때의 시간을 촬영하는 듯하다.
“피사체 하나만을 찍은 작품은 없어. 적게는 2컷에서 많게는 8컷까지 중첩해 놓았지. 한 피사체를 여러 시점(視點)에서 찍은 사진을 현상할 때 겹쳐 놓은 거지. 다수 시점이 반영된 작품으로 삶의 여러 얽혀있는 기억들을 호출해보고 싶었어. 큐픽(Cupic : 큐비즘과 사진의 합성)이라는 말로 부르면 되지 않을까.” 

이미지가 중첩돼 있는 작품을 통해 이번 사진전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선배는 차분하게 설명한다. 진한 커피 향기가 전시장의 분위기에 어울리게 따뜻하게 다가왔다.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전시돼 있는 작품들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온 낯선 존재들처럼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선배는 처음에는 미술을 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사진 작업을 함께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회화와 사진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물었다.

“인상파 화가 중에 세잔이라는 사람 알지? 세잔은 우리의 눈이 처음 보는 것은 개별 사물의 구체적인 형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는 우리의 눈이 사물을 이러저러한 색채가 어우러진 일종의 ‘모자이크’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한 거지. 이런 원초적인 시각을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기억이 통제하기 전의 순수함을 그리려고 했을지 몰라. 모델을 서던 사람이 조금 움직이자 ‘사과가 움직이는 것 봤어?’라고 면박을 줬던 일화는 그가 회화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지. 세잔은 모델을 사과로 본 게지. 모든 대상을 사과와 같은 정물로 보고 그때 느낀 순간의 시각적 인상만 그리는 것이 진정한 회화라고 생각한 거지. 그는 회화적 표현을 통해 휴머니즘적인 주제를 실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 난 어릴 때부터 인상주의 그림을 좋아했지만 그 정물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새로움을 사진에서 찾아보고 싶었지. 카메라가 빛을 통해 작업한다는 점은 인상주의와 비슷하겠지. 회화가 좀 더 갇혀 있는 삶이라면, 사진은 보다 더 열려 있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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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가 사라진 이후의 예술

선배의 지인이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사진을 다시 둘러보았다. 무한복제가 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원본보다는 복제품이 더 원본 같은 현실에서 디지털 카메라가 포착하는 사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Wa]ter Benjamin : 1892~1940)이라는 사람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시대는 아우라(Aura)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지. 예술작품의 진본에 스민,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가 아우라인데, 요즘은 진본을 보면서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 전자제품 광고에서 복제된 예술작품을 활용하고, 심지어 제품 특성에 맞게 작품을 변형하기도 하잖아. 디지털 카메라로 찍는 세상도 어떤 면에서 보면 아우라가 사라진 이후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 내가 볼 때 사진의 역사는 사라짐의 연속이야. 디지털 시대의 복제된 사진은 초창기 원판 사진의 아우라를 깔끔하게 걷어내 버렸지. ‘푼크툼(punctum; 라틴어로 ’찌름‘이라는 뜻으로, 사진을 봤을 때의 개인적인 충격과 여운의 감정)’을 사라지게 한 거야. 사진을 이야기할 때 ‘아우라에서 시작해 푼크툼을 거쳐 시뮬라크르(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거야.” 

카메라 셔터는 피사체와 찍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순간적으로 고정화한다. 그 단절의 시간 안에 우리의 기억이 갇히는 것이다. 피사체와의 공간적 거리만 갇히는 것이 아니다. 대상에 대해 가지는 감정과 영감이 감광지의 화학적 결함에 의해 포착된다. 렌즈 성능이 향상되고 셔터 속도가 더욱 빨라지면서 가능해진 스냅 촬영은 사진을 찍는 ‘현재’라는 시간을 연속화한다. 카메라 렌즈에는 모든 대상을 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원본의 세계가 갖는 아우라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지나간 모든 시간과 공간이 아우라를 가지는 건 아닐까. 그런데 디지털 카메라는 ‘찰칵’하는 소리를 통해 찍는 행위를 구분하는 셔터가 없다. 이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렇지. 디지털 카메라에는 셔터의 아이콘만 있을 뿐이야. 셔터가 없는 디지털 카메라는 피사체를 감광지의 화면 안으로 재현하거나 투영하지는 않지. 이미지를 프로그램으로 재구성해 보여줄 뿐이야. 피사체 스스로가 자신들을 찍어내고 이미지가 이미지를 복제할 수 있어. 원본의 재현이 아니라 재현이 재현을 이뤄내는 거지. 디지털 세상에는 원본의 가치가 중요하지 않아. 내 사진 작업이 찾는 것도 그런 것일 수 있어. 어차피 지나간 시간이나 기억이 그런 속성을 갖는다고 생각해. 머릿속에 내장돼 있는 어떤 순간의 기억을 원본 그대로 꺼내올 순 없지 않겠어? 디지털 카메라가 원본이 아닌 복제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기억을 담고 있는 피사체를 중첩시켜 복합적인 기억을 만들어보고 싶었어.” 

잃어버린 시간을 찍다

시뮬라크르는 처음의 한 대상에서 시작된 복제가 자꾸 거듭되어갈수록, 나중에는 최초의 대상과 유사성이 거의 없을 정도로 뒤바뀌어버린 복제를 의미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순간적이고 지속성과 자기동일성이 없지만 우리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시뮬라크르로 규정된다. 복제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 원본은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CD에 무수히 복제되어 담겨 있는 음악의 원본을 찾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시간과 순간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질 않은가. 그 최초의 기억은 시간의 원본이 아닐까? 기억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닐 테니까. 선배의 대답이 궁금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진이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질 때가 있잖아. 가령 유일하게 남아있던 옛 연인의 사진이 한 장 있다고 해보자. 관계없는 사람들에게는 빛바랜 사진에 불과하겠지만 아련한 추억을 가진 당사자에게는 무수히 많은 감정을 떠올리게 해주잖아. 사진을 볼 때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서 개인적인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 1915~1980)라는 프랑스 학자가 사용한 말이야. 똑같은 사진을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의미나 찍는 사람의 의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사진을 받아들이는 걸 의미해. 복제가 반복되는 세상에서 원본의 의미가 자꾸 사라진다 해도, 그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찌르듯 시간을 뚫고 나오는 기억

“말했던 것처럼 기억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 건 아니지. 오히려 절대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사진의 푼크툼처럼 우리의 의식에는 있잖아. 바로 그 기억을 찍고 싶은 거야. 그런데 모든 기억은 시간 안에서 현재화되어 있잖아. 10년 전 오늘은 지금 생각하는 시간에 현재화되어 나타나잖아. <시간 지우기>라는 이름은 오히려 지울 수 없는 시간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찌르듯이’ 더욱 생생하게 기억해 보자는 거야. ‘푼크툼’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찌른다’의 의미가 있대. 여하튼 시간을 담는 작업은 어떤 순간에는 고통스럽지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계속해나갈 작업인 것 같아.” 

선배의 말을 들으며 내 기억 속에서도 몇 가지의 시간이 현재처럼 떠오른다. 잊지 못할 순간을 사진에 담는다는 건, 어찌 보면 그 시간을 제외한 다른 무의미한 시간들을 기억에서 지워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진다. 마시던 커피가 식어가는 이 시간의 기억도 나중의 어느 시간에 바람처럼 불어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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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오형석 / 사진 | 김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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