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카페人  
내 마음의 카페
밤 9시의 커피

25센트 커피 한 잔, 내 설렘의 시작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당신이 휘말릴 수 있는 우연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1927) 중

무제

밤 9시.
나는 이 시간이 되면 앞선 시간에 만들었던 커피와는 다른 커피를 만든다. 그 커피는 보편타당하지 않다. 가장 보통의 커피도 아니다. ‘밤 9시의 커피’를 찾은 당신,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커피다. 가격도 1000원으로 내려간다. 외롭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 커피를 매개로 우리는 만나고, 너와 나의 이야기가 하얀 커피꽃처럼 피어난다. 언젠가 하얀 커피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야기하겠지만, 커피는 때로 별이 된다. 별은 커피로 화한다. 이곳을 찾는 누군가는 밤9시를 ‘커피렐라(커피+신데렐라)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사건.
모든 생에는 ‘사건’이 있다. 나쁜 의미의 사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은 존재론적 단절의 계기다. 말인즉슨, 사건 이후 사람은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건의 ‘전’과 ‘후’의 생은 다르다. 어떤 일을 겪고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됐을 때에만 그 일은 사건이 될 수 있다. 되돌릴 수 없음. 사건을 겪고 사람은 달라진다.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 좋고 나쁨을 떠나, 되돌릴 수 없음을 받아들일 때 사람은 반 뼘이라도 성장한다. 사건에 대처하는 자세가 중요한 이유다.

내게도 어떤 사건이 있었다.
내가 커피를 하기로 마음먹은 중요한 계기였을 것이다. 1996년이었다. 어느 햇살 좋은 가을날의 주말. 심장에 박혀서 잊지 못할 그날, 사건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있었다. 내 설렘과 사랑이 시작됐고, 훗날 아련한 통증을 동반하기도 했으며 영원히 추억으로만 남은 시간. 평범했던 한 남자의 특별했던 이야기는 그날 꽃을 피웠다. 그것은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 찾아올까 말까한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One Fine Day’라고 명명한 그날. 그 전까지 내게 대수가 아니었던 계절이었던 가을은 그때부터 향이 달라졌다. 좋고 나쁜 것은 없다. 나는 그렇게 우연한 일에 휘말렸고, 생은 이전과 달라졌을 뿐이었다.

그 사건 전까지만 해도,
나는 누군가의 뒤에서 광채나 후광이 보인다는 말, 믿지 않았다. 그게 가능해? 얼어 죽을, 콧방귀를 꼈다. 그런 내가 누군가를 보고 ‘아찔하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우리는 한국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카메라를 사고 싶다며 다운타운에 동행해달라고 했다. 낯설었던 땅, 주말에 하릴없이 하숙집에 박혀있기가 무료했든, 가을날의 바깥공기가 필요했든, 쇼핑을 하고 싶었든. 나는 나왔다. 사건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학원의 야트막한 정원.
내가 먼저 나왔다. 음악을 듣고 있었다. 기다림은 나쁘지 않았다. 햇살 좋은 가을날의 주말이었으니까. 고개를 살짝 들었다.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싶었다. 가을햇살을 등지고 걸어오는데, 뭐랄까, 눈이 아득해졌다. 하늘거리는 원피스와 파란빛 재킷, 얼굴을 감싸는 챙 넓은 모자와 푸른 선글라스로 한껏 분위기를 낸 모습이 가을 햇살과 뒤범벅됐던 순간, 내 입에선 예기치 않게 아주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심장이 반응했다. 박동 속도가 빨라지면서 쿵쿵쿵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그건 느닷없이 당하는 교통사고 같은 ‘사랑사고’이기도 했다. 준비도 예고도 없이 맞닥뜨려야 했다. 아니, 도대체 누가 그런 것을 알려주며, 그런 시나리오는 누가 써놨단 말인가. 심장은 느닷없이 발동했고, 발걸음은 이전과 달리 좀 더 가벼워졌다. 다운타운을 거닐다가 들어간 곳은 백화점 옥상 테라스에 위치한 커피하우스였다. 가을이 잘 보일 것 같다며 들어간 그곳에서 놀란 것은 커피 한 잔 가격이 25센트였다. 가난한 학생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착한 가격. 커피 두 잔을 시켰다. 햇살은 여전히 좋았고….

우리는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전부터 서로를 알고는 있었다지만, 그날은 뭔가 특별했다. 서로를 알아가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우리는 ‘전혜린’을 이야기했고, ‘사포(sappho)’를 기억했으며, ‘전태일’을 기렸다. 그녀는 남자가 ‘전혜린’을 알고 있는 것에 신기해했고, 책을 말하고 영화를 이야기했다. 악몽 같았던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군대라는 사건’에 대해서도 풀었다. 그녀가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있다는 느낌. 나는 어느새 있는 것, 없는 것 다 풀어놓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였기 때문일까.
25센트짜리 커피에 흠뻑 취했다. 당시 환율로 200원을 약간 넘는 가격. 인스턴트커피는 아니지만 싸구려 원두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커피향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처음 느꼈다. 커피와 함께 한 그녀와의 대화에 젖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의 커피향에는 내 설렘이 가미됐고, 내 첫사랑은 그렇게 커피와 함께 시작됐다. 가을날의 햇살이 그렇게 부추겨서 그랬을까. 그날의 모든 것들은 내가 휘말릴 수 있는 우연한 일들로 가득 채워졌다. 가을날, 햇살, 주말, 카메라, 다운타운, 예쁜 커피하우스, 25센트 커피 한 잔,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

25센트 커피 한 잔.
나는 그 한 잔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커피를 내려준 사람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그 순간의 공기와 커피향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25센트 커피 한 잔의 잊지 못할 가을의 기억이다. 25센트짜리 커피 한 잔에 담긴 25달러짜리 커피 향을 맡으며 새긴 25만 달러짜리 기억. 조잘대던 그녀의 입술, 가을햇살 담은 그녀의 맑은 눈, 빙긋 미소 지을 때 들어가는 그녀의 보조개, 내 말에 자지러지던 그녀의 함박웃음, 그리고 내 심장박동을 뛰게 하던 당신. 나는 그날, 그 순간을 그렇게 기억한다. 그리고 역시 우연한 일들에 휘말린 나는 지금 커피를 하는 사람이 됐다.

무제

그런 사건은 누구에게나 있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형태로든 다가왔거나 다가온다. 가령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로, 애써 문제의식을 외면하고 달리던 내가 ‘일단 멈춤’을 택한 것은 그 가을날의 햇살과 25센트 커피 한 잔 때문이었다. 언제든 가을햇살은 고왔는데, 내 삶은 질척거렸다. 뭔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떤 간극이 자꾸만 생을 좀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나날 속에 내 목을 타고 내려간 커피 한 잔. 그날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뜻밖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됐다. 지금 세상에서 나가기로 했다. 관성처럼 바라보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됐다. 달리 보였고, 달리 보게 됐다. 내 생을 칭칭 동여매고 있던 붕대를 벗어던지기로 했다. 허위로 나를 지탱하던 직업을 그만 뒀고,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 돼보고자 문득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커피를 만드는 남자가 됐다.
최고의 커피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고의 커피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나는 ‘당신’이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커피를 만드는 남자가 됐다. 커피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사유하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나는 드립커피를 내리는 속도로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 이전에 달렸던 속도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힘들었음을 알았다. 간극은 좁혀졌고, 나는 이전보다는 행복한 사람이 됐다. 커피의 우아한 맛은 나를 평화의 상태로 이끌었고, 커피의 역사와 유통을 통해 세상의 불공정한 교역실태를 새삼 깨달았다. 커피의 다양한 맛과 다양한 변수에 의한 변덕(?)은 사소함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뭣보다 내게 어울리는 속도를 찾았다. 모두 똑같은 시간을 살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생에 묻은 시간의 결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좋은 이야기라 함은,
그것이 끝나도 삶 속에서 계속되는 이야기라고 했다. 나의 시시콜콜한 커피 이야기가 삶 속에서 계속되길 바라는 이유다. 만약 이 이야기에서 알싸하고 좋은 커피향을 맡았다면, 당신은 ‘밤 9시의 커피’에 꼭 와주면 좋겠다. 당신만을 위한 커피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특별한 당신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커피를 만든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그냥 그때 마신 커피향이 참 좋았다고만 기억해주면 좋겠다.

‘밤 9시의 커피’는 이렇게 문을 연다.

무제

P.S. 그날, 우리는 걷고 또 걸으면서 인근의 대학 캠퍼스까지 섭렵했다. 원래 목적이었던 카메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그날을 꾹꾹 눌러 담았다. 가을햇살을 맞았고, 산책을 했으며, 커피를 마셨다. 커피와 함께 한, 커피 향 같은 그녀와 마주한 그 순간을, 그 사건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그녀가 잘 지내는지 묻고 싶을 때면 하늘에 대고 묻는다. 늘 나를 감탄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나와 늘 커피를 마시던 사람이었다.

글 | 낭만(김이준수)
낭만 님은 사회적금융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커피스토리텔러입니다. ‘스스로 걷는 사람’으로서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말을 현실화하고자 천천히 걷고 있습니다. 《마을을 상상하는 20가지 방법》을 썼고, 《그림자아이가 울고 있다》의 스토리텔링을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