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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서재
[삶이라는 빙판의 두께]

분별심이라는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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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소 무엇인가를 늘 비교하고 평가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사람의 경우 친분이나 공사 구분에 다소 영향을 받긴 해도 대부분 자신의 판단 기준에 따라 마음속으로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그 친구 참 괜찮은 사람이야”, “저 이는 말이 너무 앞서지”, “저 사람은 너무 경박스러워”, “저 사람은 신뢰할 수 없어” 등등 은연중 교류하는 사람의 외모나 언행, 품성, 태도 등에 대해 평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 판단 및 평가 기준에 따라 교류의 깊이가 좌우되기도 한다. 

사물도 예외는 아니다. 산과 들에서 마주치는 꽃을 보고도 우선은 형태나 모양, 빛깔 등에 영향을 받겠지만, 결국 자신의 미적 기준과 선호도에 부합하는지 평가하여 호불호를 나누곤 한다. 
시장에서 과일 하나를 사더라도 흠은 없는지 다른 것에 비해 크기나 모양은 괜찮은지 이리저리 살핀 뒤 평가 기준을 충족시키는 걸 선택하게 된다. 옷을 고를 때는 더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색감과 질감, 가격, 유행 여부 등 세세한 부분까지 따져 보고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행태, 즉 매사에 비교와 평가를 거듭하는 사이 우리가 얻게 되는 실익이나 효용 가치 못지않게 잃는 것도 생길 수밖에 없다. 나누고 재단하면서 부지불식간에 편을 가르게 되고 나도 모르게 차별적 인식이 마음 한편에 똬리를 틀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분별심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나와 너,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따위를 헤아려서 판단하는 일을 일컫는 개념이며 바로 이 분별심에서 불행이 싹튼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적, 물질적 부분을 두고 나와 타인의 상황을 비교하다 보면 자칫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쉽다. 자신의 처지나 환경에 맞춰 사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인간인지라 그 적절한 눈높이를 조절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부분에서 우위의 가치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할 수 있겠다. 가령, 품성이나 정신적인 면, 지적 수준 등을 고양하는 따위 말이다. 물론 거기에 상대적 보상심리를 들이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이만큼 살았으면 어느 정도는 분별심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옳다. 그런데 나는 아직 사람이 덜돼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곧잘 나의 빈한한 처지와 옹색한 환경을 한탄하게 된다. 

타인과 단순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가치가 분명 있을 텐데 그런 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요 며칠 나의 생활환경에 대해 자조적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기에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나를 다잡고 다독거리는 의미에서 분별심에 대한 두서없는 생각을 정리해 본다.

- <카페의 서재> 제1권 《삶이라는 빙판의 두께》 중

 

삶이라는 빙판의 두께

《삶이라는 빙판의 두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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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충화
정충화 님은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 식물해설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눈에 척척 식물, 나무의 이름을 불러줍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언제든 산과 들에서 만날 수 있는 식물들이 있어 든든합니다.